─ 핥아라.
회랑의 구석진 곳에서, 저택의 사용인 레베라는 당황스러움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저택의 주인이자 지체 높은 자작 가문의 가주인 테오라드가 중정에서 엘프 노예를 개처럼 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레베라가 기억하기로 테오라드는 착한 사람이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늘 친절하게 굴고,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노예들에게도 절대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저 엘프 노예야 저택에 들어온 첫날에 테오라드가 아끼는 명품 항아리를 깨트려서 벌을 좀 받긴 했다지만, 웬만한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만한 가치의 항아리를 깨트렸음에도 불구하고 엘프에게 내린 벌은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다.
기껏해야 굴종의 자세를 유지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먹이는 것에 불과하지 않았나. 그마저도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벌인 눈속임일 뿐이었다.
다른 가문이었으면 노예의 팔다리를 자르고 대낮에 채찍질을 하여 말려 죽였을 텐데, 식고문 선에서 끝내준 것은 참으로 자애로운 행위였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저 엘프가 저런 수모를 당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매일 밤시중을 들게 만드는 것에 모자라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고 신발을 핥게 만들다니. 아무리 노예를 물건처럼 굴려도 된다지만 이건 레베라가 알던 테오라드가 아니었다.
‘……가주님이 변했어.’
들은 적이 있다. 얌전하고 예의바르게 굴던 사람이 가주가 되기만 하면 성정이 뒤바뀌어 폭군처럼 날뛴다는 것을.
어쩌면 테오라드도 그런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
‘전대 가주께서 급병으로 돌아가신 것도 설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슬슬 뒷걸음치던 레베라는 서둘러 회랑을 빠져나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자신이 본 끔찍한 현실을 영구히 함구할 수 있을까.
레베라는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 내게 가문의 번영을 논한다면, 고개를 들어 중정의 중앙에 세워진 아버지의 석상을 보라고 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명망 높은 데하름 자작가의 전대 가주이자, 백작령에 둘도 없을 훌륭한 인재이며 탁월한 지도자였으니.
반면에 가문의 몰락을 논한다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몰락의 시초가 바로 내 발 아래에 있었으니까…….
“후엑… 흅…….”
엘프가 내 신발 밑창을 핥고 있다. 그냥 핥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진심을 다해서 정열적으로.
혓바닥으로 내 신발 밑창에 끼여 있는 흙먼지들을 삼키면서 켁켁 거리다가도, 다시 혓바닥을 내밀어 정성스럽게 내 신발을 혀로 닦아내었다.
신발을 뒤덮고 있던 흙먼지는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엘프의 침이 흥건해진다.
일평생 이런 변태적인 행위는 해본적도, 하고 싶었던 적도 없는 나로서는 안면 근육이 원치 않는 방면으로 꿈틀거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역으로 내가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돌아버리겠네.’
분명…… 어렸을 적 동화책에서 본 엘프는 상냥하고 사려가 깊은 존재였다.
길 잃은 모험가를 극진히 대접해준다던가, 상처를 입고 숲으로 도망쳐온 패잔병에게 도움을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 선량한 종족. 그게 바로 엘프였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뭔가. 내 발 아래에 깔려서 게걸스럽게 신발을 핥아대는 이 정신 나간 여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도무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서 더 두려웠다…….
“후에.”
광택이 날 때까지 신발을 핥아댄 엘프가 고개를 뒤로 물렸다. 엘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침이 실타래처럼 늘어지다가 뚝 끊어진다.
숨을 한 번 고르던 엘프가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열었다.
“멍멍.”
설마 개목줄을 찼을 때는 사람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진짜로 개 흉내를 내는 건가?
상기된 얼굴로 날 올려다보는 모습이 왜인지 소름끼친다. 나는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여 잠시 굳어 있다가, 천천히 발을 빼내었다.
꽤 오래 밟고 있어서 그런지 엘프의 가슴에 신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네가 얼마나 밑바닥 인생인지 체감을 했을 거라고 본다. 오늘의 벌은 이 정도로 끝내줄 것…….”
삽시간에 싸늘해지는 엘프의 낯빛. 나는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으로 보였느냐! 이 건방진 종년이!”
내가 악을 내지르며 엘프의 얼굴을 밟았다. 그렇다고 진짜 밟은 건 아니다. 그냥 살짝 얹기만 했다.
“히익, 끼이……!”
하지만 그 미묘한 힘의 차이를 엘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발에 얼굴을 밟히면서 모종의 쾌락을 느끼는 것 같았으니까.
“그마안…… 그만해주세요 주인닝……!”
엘프가 손을 들어 내 발목을 붙잡는다. 순간 발목을 부러트리려는 줄 알고 심장이 덜컥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내가 생각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아파아앗……!”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엘프는 내 발목을 잡아당기며 자신의 얼굴을 좀 더 세게 짓밟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시발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나 맞춰주지 못할 건 없었다.
“또 사람 말을 하는구나! 건방진 개새끼 주제에─!”
“꺄앙!”
엘프의 머리를 풀밭에 처박게 만들고 발에 힘을 주어 내리눌렀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진짜.’
억울해서 울고 싶었다. 난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렇다고 연기를 그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엘프의 뺨에 신발자국이 새겨질 정도로 짓밟은 다음에 호흡을 추스르며 발을 들었다.
“후우. 한 번만 더 사람 말을 했다가는 이보다 더한 곤욕을 치를 줄 알아라.”
아뿔싸. 내가 말해놓고도 놀라서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더한 곤욕을 치르게 해주겠다고 말해버려서 이 엘프가 일부러 청개구리처럼 굴면 어떡하지? 그럼 완전 외통수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내려다보자, 엘프가 눈물 젖은 눈동자를 감으며 살며시 입을 달싹였다.
“머어엉…….”
하아. 다행이다. 지금 당장은 충분히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 상황을 내게 유리하게 만들었으니 이제 이 엘프도 더는 불만을 표시하지 못할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몸을 돌려 일어나라.”
“끼잉…….”
헌데, 목줄을 잡아당겼으나 엘프는 일어나지 않았다.
곤란한 얼굴로 우물쭈물 거리더니 손을 내려 자신의 음부를 매만진다. 안달 난 것처럼 다리를 배배 꼬는 것은 덤이었다.
설마 교미를 원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건 이쪽이 곤란하다. 고추 잘못 놀렸다가 만족을 못 시켜줘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성욕이 아무리 왕성하더라도 공포를 이기진 못한다.
어렸을 적에 우연찮게 알현했던 황제 폐하도 이 여자보다 무섭진 않았는데, 황제 폐하보다 더한 년과 어떻게 섹스를 한다는 말인가.
제정신이 아니라면 모를까, 지금 상태에서는 무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사실 확인은 해야 한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느긋하게 말문을 열었다.
“교미라도 하자는 건가? 내가? 너 같은 종년이랑? 하! 네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내가 너를 범하는 것은 네가 원할 때가 아니라 내가 원할 때다!”
일부러 허세를 담아 말했다. 그러면 알아서 의지를 굽힐 줄 알았는데, 엘프는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면서 눈물까지 찔끔 흘리기 시작했다.
“끼이잉, 히잉…….”
뭐지? 지금 보니 성교를 원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건가? 잠시 머뭇거리던 내가 오만하게 턱을 까딱거렸다.
“오늘밤은 특별히 사람 말을 하게 해주지. 왜 그러는지 말하라.”
“네엣……! 저어,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서어……!”
“오줌?”
오줌이라면 그냥 누면 되는 거잖아. 저택에 화장실이 널리고 널렸는데. 사용인들이 쓰는 화장실만 해도 다섯 개가 넘고, 노예들에게 쓰라고 만들어 놓은 화장실도 두 개나 된다.
모두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를 시켜서 냄새가 나거나 그러지도 않는데. 굳이 나한테 애걸복걸할 필요가……?
‘아.’
있다. 있었다. 이거 그거다.
‘방뇨 플레이.’
언젠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음란한 홉고블린 메이드’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한정판으로 발매된 해당 양장본에서 비슷한 플레이가 나온다. 처음에는 그게 허무맹랑한 소설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경험담이 맞는 것 같았다.
지금 내 눈앞의 엘프가 그걸 원하고 있었으니까.
‘잠깐만. 그럼 음란한 홉고블린 메이드를 쓴 저자는 실제로 홉고블린과 섹스를 했다는 건가?’
아버지는 그걸 또 왜 산 거고? ……집어치우자. 상상하니 괜히 속이 메스꺼워진다. 지금은 내가 처한 상황에 집중할 때였다.
“오줌이 마렵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누면 되겠군.”
“주, 주인님. 제발 선처를…… 부디 이 돼먹지 못한 암캐에게 화장실을 쓰게 해주세요…….”
반응을 보니 맞구나. 자신감을 되찾은 내가 재차 비죽거렸다.
“암캐에게 화장실이 왜 필요하지? 너는 길거리의 똥개가 화장실을 쓰는 걸 본 적이 있나?”
“너무해엣……!”
“너무한 건 아직도 제 처지를 인지하지 못한 네 하등한 머릿속이다. 내가 더 열 받기 전에, 일어나서 주변에 소변을 보도록 해라.”
엘프가 어쩔 수 없다는 양 몸을 돌려 바닥을 짚는다. 그대로 아무 풀밭이나 오줌을 쌀 줄 알았는데, 엘프는 왜인지 내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며 묘하게…… 아버지의 석상 쪽을 힐끔거린다.
‘잘못 봤나?’
혹시나 싶어서 자세히 관찰해보니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 엘프는 명확하게 내 아버지 석상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설마 저기에 오줌을 싸고 싶다고?
아니, 석상에 오줌을 싸고 싶다는 것보다는 내가 인간쓰레기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 석상에 노예의 오줌을 묻히는 가주라. 자신을 지옥 밑바닥까지 매도해줄 상대로는 적격이 아니던가.
하지만. 하지만…….
‘그건 아니지 시발련아!’
안 한다! 죽어도 못 한다! 어떻게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석상에 노예 따위의 오줌을 묻히겠는가.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인니임… 소변은 어디에 봐야하나요……?”
……내 목에 칼이 들어왔다.
질문까지 하는 걸 보면 의도가 명확해 보인다.
“소변은…….”
나는 손을 떨며 목의 브로치를 좀 더 느슨하게 풀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서늘한 날씨인데도 이마에 땀이 맺힌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의도치 않은 선택지에 놓이고 말았다.
근처 수풀에 오줌을 싸게 만드는 것으로 불확실한 생존을 보장받을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석상에 오줌을 싸게 만드는 것으로 확실한 생존을 보장받을 것인가.
생각을 하자, 생각을.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야한다. 나 하나의 목숨이 걸렸다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잘못하면 저택의 식솔들이 모두 말살 당한다.
거기다…… 아버지의 석상에 노예의 오줌을 묻히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나 혼자밖에 모르는 일. 명예가 실추되는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 자존심을 챙기다가 목숨이 사라지면 본말전도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일단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울분을 삭히며 입을 열었다.
“저 석상에 누도록 해라. 그 편이 재미있을 것 같군.”
그러자 엘프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진다.
“네, 네에? 하, 하지만 저 분은 주인님의 아버지세요…….”
나도 안다고 이 시발련아! 네가 하자며! 네가 눈빛으로 다 말했잖아!
“상관없다. 내 아버지가 뭐 어쨌다는 거지? 죽어버린 이상 그저 송장일 뿐이다. 아니면, 내 명령에 불복하기라도 할 것인가?”
“아, 아닙니다앗…….”
“그럼 따라와라.”
엘프의 목줄을 잡아당겨 아버지의 석상으로 향했다. 엘프는 내 목줄에 이끌려 풀밭을 기면서 석상까지 다가가더니, 재차 명령을 부탁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쓰레기 년. 빨리 눠라.”
“아앗. 네엡……!”
허락을 받은 엘프가 개처럼 다리 한 쪽을 들고 쭈뼛거린다. 잠시 기다리자 쪼르르─ 엘프의 음부에서부터 샛노란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석상의 발끝을 물들여갔다.
서늘한 날씨 덕분인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든다.
곡선을 이루며 뿜어지던 오줌 줄기는 천천히 줄어들어 엘프의 요도구에서 찔끔 찔끔 흘러나왔다. 엘프의 고간을 타고 흘러내리는 잔뇨를 내려다보던 내가 냉혈한을 연기하며 읊조렸다.
“네가 싼 오줌은 네가 핥아먹어라.”
“그, 그거언…….”
“당장.”
엘프가 어깨를 흠칫 떨고는 고개를 숙였다. 스르르 흘러내린 은발의 끝자락이 아직 마르지 않은 오줌에 적셔지고, 소담한 혓바닥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아버지 석상의 발치에 싼 오줌을 핥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맞는 걸까. 나는 눈언저리를 매만지며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아들이 호로 자식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나를 내려다보는 아버지 석상의 눈빛을 견디기 힘들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망양한 밤하늘에 펼쳐진 무수히 많은 별빛들이, 나를 꾸짖는 조상들의 눈동자처럼 보여서 죄스러움이 배가 되었다.
‘제 인생은 망한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가문이…….’
죗값은 지옥에서 달게 받겠습니다.
면죄부도 사지 않겠습니다.
“흐긋, 냄새가아……! 용서해 주세요 주인니임…….”
아니…… 어쩌면 여기가 지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엘프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아버지 석상에 오줌을 누게 만드는 것은 문제 해결의 단초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말았다.
뚜벅─
내 발소리에 맞춰 엘프가 네 발로 저택의 복도를 기어가고 있었다. 내 바로 옆에서 말이다.
그래서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타오르는 촛불들이 저택에 드리운 어둠을 미미하게나마 밝혀주고 있었지만, 내 심란한 마음은 조금도 밝혀주지 못하였다.
‘대체 왜 아직까지 기어 다니는 건데!?’
나는 분명 저택에 들어왔을 때 말했다.
알몸 산책은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두 발로 서라고. 그랬더니 엘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은 아직 벌을 덜 받았다며 울먹거렸다.
그것은 즉, 이 음란하고도 간악한 엘프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뭘 더 하라고……!’
태연함을 가장한 내 얼굴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파르르 떨린다.
이 침묵, 이 고요가 무섭다.
다른 때라면 평화롭다고 느꼈을 잔잔한 풍경이, 내 옆에서 기어 다니는 엘프로 인해 수라의 세계로 바뀐다.
직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엘프를 방으로 밀어 넣으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
“히잉. 무릎 아파아…….”
나는 엘프의 칭얼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기억을 되짚어보자. 엘프가 이러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인 없는 도정은 없다. 내게서 뭘 원하는지 파악하는 게 관건……?
‘설마.’
헛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엘프가 왜 이러는 것인지 대강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 알몸 산책 이후에는 ‘성고문’ 시간을 갖도록 하지.
되돌아보니 죽기 싫어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에 분명 성고문이란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엘프 입장에서 보자면 알몸 산책은 에피타이저, 메인 디쉬는 성고문인 셈이다.
이제 좀 이해가 간다. 이 엘프는 주방장인 내가 요리를 내놓고 있지 않으니 무언의 항의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병신새끼!’
안일했던 과거의 나에게 분노가 차오른다. 뭐가 성고문이냐! 성고문은커녕 여자랑 관계조차 맺어보지 못한 새끼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진정하자.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쉽지 않지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래봬도 나는 명문 귀족가의 자제로 태어나 수많은 처세술을 익힌 몸이다. 이따위 역경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개새끼가 따로 없군.”
조소를 머금은 내가 자리에서 멈춰 섰다. 자연히 엘프도 기어가다 말고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손을 풀었다.
“배를 까뒤집어라. 성고문을 시작할 터이니.”
“주, 주인니임…….”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내가 싸늘하게 내려다보자 엘프가 배를 까뒤집고 강아지 포즈를 취했다.
가슴이며 음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태.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서는 그 어떠한 정욕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욕이 싹 달아날 만큼 이 엘프가 무서웠으니까…….
“우선.”
내가 발을 들어 구두를 벗었다. 그대로 양말까지 벗은 다음 맨발을 엘프의 입에 들이밀었다.
“완전한 복종의 의미로 내 발에 입맞춤을 해줬으면 좋겠군.”
중정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레퍼토리였지만 별 수 없었다.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너무햇……!”
그래도 엘프는 괜찮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군말 없이 땀내가 진동하는 내 발을 핥았다.
이정도면 됐다고 생각하고 발을 빼내려는데, 엘프의 혓바닥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바람에 멈칫하고 말았다.
어디까지 하나 싶어서 가만히 내버려뒀더니 이제는 내 발가락을 자신의 구강에 집어놓고 쭙쭙 빨기 시작했다.
‘대체 왜 빨아대는 건데……?’
애초에 내 명령은 입맞춤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한 술 더 뜨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잠시 어벙한 상태로 있던 나는 뒤늦게 헛기침을 하며 발을 들었다.
“앗.”
빨아먹던 발을 빼앗겨버린 엘프가 모종의 살기를 내뿜기 전에, 나는 빠른 판단으로 엘프의 음부에 발을 가져다대었다.
오줌인지 애액인지 모를 것들에 젖어있어서 그런지 꽤나 축축하다.
“천박한 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흥분한 것이냐? 정말이지 개보지가 따로 없구나.”
“흐윽. 그런 말씀은 그만둬주세요…….”
“그만? 하! 내가 네 년에 대한 폭언을 멈추는 것은 네 년이 죽었을 때뿐이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정도 이상으로 심한 말을 내뱉으며 엘프의 음부를 꾹 눌렀다.
“흐규웃……!”
그러자 엘프가 혀를 빼 내밀며 몸을 움찔 떤다. 그 관능적인 자태에 나는 희열을 느꼈다. 가학심에 눈을 뜬 건 아니다. 생존에 대한 희열이었다.
‘나 잘하고 있잖아!’
이대로라면 별 일 없이 오늘밤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에 찬 내가 엘프의 음부를 꾹꾹 누르면서 입매를 한껏 비틀었다.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네년은 기실 돼지만도 못한 쓰레기였구나!”
“흐극, 끄읏!”
“하하하. 어떠냐? 네 인생이 유린당하는 기분이?”
“흐우…….”
“절망스럽나? 죽고 싶나? 어디 말이라도 해보시지!”
“으음…….”
응? 왜 갈수록 반응이 시원찮아지는 거지?
‘내가 실수했나?’
제대로 음부를 눌러주면서 쓰레기 같은 말을 퍼붓고 있었는데? 이보다 더 악랄하게 굴 수가 없는데 대체 어느 부분에서 실망한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흠.”
두려운 마음에 발을 지면에 내려놓고 턱을 쓰다듬었다. 일단 최대한 시간을 벌면서 엘프의 안색을 살펴보자.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다면 찾아내야만 한다.
‘대체 뭐야?’
하지만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저 무기질한 눈동자는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 어?
잠깐만. 저 엘프는 지금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내 뒤편에 있는 초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트막한 깨달음에 내면의 입이 벌어진다.
그래. 처음부터 이 엘프는 초를 이용한 성고문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벌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군.”
판단을 마친 내가 뒤돌아서 벽에 걸린 촛대를 꺼내들었다. 촛대 위에서 심지를 불태우는 불꽃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촛농으로 몸을 지져주지. 그럼 네 년도 조금이나마 나에 대한 경외감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시, 싫어어어엇……!”
소스라치게 놀라는 엘프를 보니 내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걸린다. 이게 정답이었구나.
“지금부터 통렬한 엘프 구이 퍼레이드를 실행하도록─”
촛대를 기울이다 말고 흠칫하고 말았다. 이쪽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엘프의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처연했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요 주인님…….”
어? 저거 연기 맞나? 혹시 정말로 싫어하는 거 아닐까? 엘프가 초를 이용한 성고문을 원한다는 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게 촛농이다. 저온초면 모를까 일반적인 초에서 흘러내리는 촛농은 피부에 화상을 입힐 정도로 뜨겁다.
이래서야 성고문이 아니라 그냥 고문이잖아. 아무리 마조라도 이런 걸 좋아할 리가 없을 거 같은데. 우물쭈물하던 내가 정확한 판단을 위해 목소리를 거만하게 깔았다.
“좋다. 한 번만 기회를 주지. 단, 조건이 있다. 울음을 멈추고 내게 미소를 보여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일반적인 노예라면 할 수 없다. 구타를 당하고, 촛농 고문 예고편까지 들은 시점에서 어떻게 미소를 짓겠나.
하지만 엘프라면 다르다. 저 몸짓과 표정의 상당 부분이 가식에 불과했음으로 언제든지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미소를 지어주길 바란다. 나도 이런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흐극, 흐아아앙……!”
하지만 엘프는 보라는 듯이 울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울음을 참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이거 아무리 봐도 촛농을 떨어트려달라는 신호나 다름없다. 망할.
“버러지가. 네가 자초한 일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촛대를 기울였다. 녹아내린 촛농이 초의 끄트머리에 매달리다가 엘프의 배에 툭 하고 떨어진다.
“히약─!”
살 타는 냄새. 미약한 연기와 함께 엘프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른다.
덕분에 식은땀을 흘리던 내가 복도의 앞뒤를 살펴보았다. 혹여나 식솔들이 이 비명을 듣고 깰까봐 노심초사한 것이다.
‘……없지?’
다행스럽게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으며 엘프에게 경고하듯 읊조렸다.
“비명을 지르지 마라. 한 번만 더 내 귀를 피로하게 만들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네, 네에…….”
엘프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서려있었다. 연기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애처롭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내쉬고는 재차 촛농을 떨어트렸다.
“──!”
그때마다 엘프는 몸을 꿈틀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걸 보고 있는 나도 고통스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연기고, 아무리 가식이라고 해도 이건 엄연히 남을 괴롭히는 행위다. 상대방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는 여자를 괴롭히면서 쾌감을 느끼는 취미 따위는 없다. 그러니 지금의 이 행위가, 일련의 폭력이 내 양심의 사각형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쯧.”
이제 한계다. 더 했다가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피곤하군. 오늘은 여기까지다.”
촛대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바닥에 처박힌 충격으로 촛불이 꺼지면서 일대에 어둠이 드리운다.
나는 어둠을 이용하여 오만함을 연기하던 표정을 풀었다. 가면이 벗겨진 자리에 죄책감과 혼란이 몰아친다.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으로 겨우내 평정을 되찾은 내가 입술을 짧게 달싹였다.
“뒷정리는 네 년이 하도록 해라.”
옷매무새를 다듬은 내가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뒤편에서 시선이 느껴졌기에 최대한 태연하게, 기품 있는 걸음걸이를 유지하였다.
그리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바닥을 박차고 내달렸다.
입을 열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나는 내 방을 찾아서 들어갔다. 곧장 몸을 돌려 문을 닫아버리고 걸쇠를 채운 다음, 문에 등을 기대고 털썩 주저앉았다.
‘벗어났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엘프의 반응을 살펴야만 한다.
나는 왼쪽 검지에 착용한 반지를 툭 눌러서 감시 오브젝트를 작동시켰다. 반지에서 방사된 푸른 기운이 사각형의 창을 이루며 엘프의 방을 비춘다.
잠시 기다리자 엘프가 방에 들어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가만히 있던 엘프가 손가락을 딱 튕긴다.
동시에 물기를 머금은 바람에 엘프의 몸을 감싸더니 눌러 붙은 촛농을 말끔히 떼어내었다. 화상을 입은 피부도 순식간에 아물어 원래의 매끈한 피부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품. 나른한 얼굴로 눈을 비비던 엘프가 침대로 기어들어가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렸다.
─ 테오라드 데하름이라고 했던가.
평소의 칭얼대는 목소리가 아니라 더없이 저조하고 권위적인 말투. 내가 침을 꿀꺽 삼키며 엘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으음.
엘프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툭툭 치며 생각에 잠긴다. 오늘밤에 겪은 일들을 상기하는 것처럼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엘프는, 별안간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 오늘은 나쁘지 않았지~ 확실히 소질이 있어.
사, 살았다.
“하아아…….”
생존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에 기탄어린 한숨이 흘러나온다.
감시 오브젝트를 꺼트린 내가 손을 들어 안면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버텨냈지만…….’
내일도, 그 다음 내일도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명망 높은 데하름 자작가의 가주이자 백작 각하가 신임하는 부백작인 내가 저 간악한 엘프한테 놀아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내 저택에 기거하는 귀쟁이 악마를 내쫓아버리기 위한 대책을……!
‘내 저택에 들어온 것을 기필코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엘프!’
나는 이를 빠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만두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서 제대로 설 수가 없었던 탓이다.
“흐, 흐음.”
일단은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좀 더 앉아있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