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라드가 나간 고해소에서, 함타르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석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엘프 노예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정상적인 노예는 아니긴 했다. 첫 대면에서 보여준 기세는 확실히 노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기사단을 불러달라니. 허풍이 심하다.
‘상황을 모면하려는가.’
함타르신은 여태 테오라드와 같은 짓거리를 하는 귀족들을 꽤나 봐왔다. 적당히 강한 노예를 사들여 자신이 행한 악행을 덮어씌우기 위한 보험으로 쓰는 걸 말이다.
일반인에 비하면 월등히 강하다고 해도, 대부분의 노예들은 마경의 흑마법사가 몸에 새긴 각인을 이겨낼 순 없었으니 주인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귀족들은 그 점을 이용하여 자신이 행한 패악을 노예의 짓이라 변명하여 죄를 피해가곤 하였다. 테오라드의 경우에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과대망상자.’
혹은 사기꾼의 기질이 테오라드의 본모습이리라. 수없이 많은 이단을 심판해 온 함타르신에게 있어서 테오라드의 속내는 음험해 보일 뿐이었다.
‘만약 가주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아비의 석상에 소변을 누게 만든 건 씻을 수 없는 죄. 또한 교단을 들먹여 자신을 욕보인 점을 가만히 놔둘 정도로 함타르신은 자비로운 편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데하름 가문을 징벌하고 테오라드에게 사과를 받아내고 말 것이다. 함타르신이 그런 생각을 하며 석판을 들어 올렸을 때, 고해소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반대편에 착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군.’
엘프 노예와 마주하게 되었지만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는 간단한 질문을 하여 속내를 떠 볼 속셈이었으니까.
함타르신은 석판을 매만지며 시큰둥하게 말을 내뱉었다.
“잘 들어라. 너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화르륵─
얼굴의 옆면이 뜨겁다. 당황한 함타르신이 고개를 돌리자,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칸막이가 불타올라 한 줌의 재가 된 것이 보였다.
그 너머에서, 아름다운 은발을 자랑하는 엘프가 초연한 태도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까드득─
뽑아들려던 검이 얼어붙는다. 뒤이어 고해소 내에 말도 안 될 정도의 추위가 스며들었다. 호흡에서 한기가 흘러나오고 손끝이 가볍게 동결한다.
‘이게 대체 어떻게.’
이건 일개 노예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아니, 날고 기는 마법사들도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마법을 연계시키지는 못한다.
‘설마 가주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나?’
당황한 함타르신의 호흡이 가팔라지고 동공이 확대된다. 그는 모종의 두려움을 느끼며 입술을 떨었다. 엘프는 경멸의 시선으로 함타르신의 손에 들린 석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방진 단명종.”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색의 말이 마법으로 형상화되어 함타르신의 주변을 점거해나갔다. 주변의 온도는 갈수록 떨어지고, 이젠 정상적인 호흡이 힘들 정도로 숨이 막혀왔다.
“네가.”
커헉! 무형의 손이 목을 옥죄어온다. 함타르신이 이를 악 물며 손을 떨었다. 잇새로 흘러나오는 침이 턱을 따라 애처롭게 떨어진다.
그럼에도 엘프는 자신의 마법을 느슨하게 풀어주거나 함타르신의 처지를 봐주지 않았다. 상대방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마법을 유지해주는 것이 엘프가 내리는 유일한 자비였다.
그 독선적인 태도를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몸에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함타르신은 자신을 몰아붙이는 엘프에게서 언뜻 고고함까지 느낄 정도였다.
“어째서.”
사경을 헤매는 함타르신을 지켜보던 엘프가 차분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테오라드를 죽이려 들었지?”
끝없는 고통 속에서 들려오는 엘프의 말에, 함타르신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주, 죽이려 하지 않았, 나는 단지…… 이단 심판관으로서억……!”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단락처럼 끊어진다. 떼어낼 수 없는 무형의 손이 목을 한껏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함타르신은 억울함을 넘어서 울분을 느꼈다.
테오라드를 죽이려들다니? 자신에게 그럴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케헥, 끅……!”
이제는 침을 넘어 게거품이 흘러나온다. 까뒤집은 눈에 생기가 사라지기 직전, 엘프가 고개를 까딱였다.
“좋아.”
함타르신의 목을 조르던 무형의 손이 사라진다. 허어억! 함타르신은 급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사레에 들린 사람처럼 연거푸 기침을 토해내었다.
엘프는 침과 콧물로 범벅된 함타르신의 얼굴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좌석에 등을 기대었다.
“편의를 봐줄 테니 말해. 왜 테오라드를 죽이려 들었는지.”
가까스로 숨을 고른 함타르신이 고개를 들었다.
“너는 도대체 뭐하는…….”
“내가 반말을 허락한 적이 있었나?”
뿌드득! 함타르신의 검지가 기형적으로 꺾였다.
“으아, 으아아아아악─!”
뼈가 부러진 고통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미친 사람처럼 고통에 몸부림치던 함타르신이 도망치기 위해서 고해소의 문을 붙잡았지만, 덜컥! 문은 밖에서 잠긴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문고리를 붙잡고 돌려대던 함타르신은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고해소의 문을 두드렸다.
“열어! 열어줘! 제바, 제발!”
흡사 지옥을 탈출하려는 죄인처럼 악을 내지른다. 함타르신은 필사적으로 고해소를 나서려고 했으나 엘프는 그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볼 뿐이었다.
“소리쳐도 소용없어. 고해소에 방음 결계를 쳐놨으니까.”
“흐, 흐윽…….”
문고리를 돌리던 함타르신이 체념한 듯 낮게 흐느꼈다. 교단의 위세를 등에 업은 채 권위적으로 굴던 모습은 온대간대 없이, 엄한 부모에게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용서만을 바라게 된 것이다.
“저, 저는 테오라드 가주님을 죽이려고 한 적이 없는…….”
꽈드득! 함타르신의 중지가 꽈배기처럼 뒤틀렸다. 방금 전보다 더한 고통에 함타르신은 입을 한껏 벌린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고통이 역치를 초과하자 비명조차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간헐적으로 침을 흘려대며 꺽꺽거리던 함타르신은 자신이 왜 이런 오해를 받는지 어렵사리 알아차렸다.
‘서, 석판……!’
테오라드가 저 석판을 자신에게 넘겨주고 갔기 때문에 엘프가 이 허무맹랑한 오해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엘프가 들어줄 리가 없었다. 엘프의 머릿속에는 이미 함타르신이 범인으로 확실시되어 있었을 테니.
‘이, 이 영악한 악마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석판을 넘겼을 것이다. 하긴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 아비의 석상에 오줌을 눈 범인이 자기 자신이면서 교구에 이단 심판관의 파견을 요청하다니? 누가 봐도 자신의 죄(엘프를 공격한)를 떠넘기기 위한 계책이 아니던가.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거냐……!’
악마보다 더한 인간 같으니! 함타르신이 고통에 신음하면서 이를 빠득 갈았다. 수렁에 빠지고 말았지만 어떻게든 엘프의 빈틈을 노려서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찾아야한다.
완화되는 고통 속에서 엘프의 눈치를 보던 함타르신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엘프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보고 만 것이다.
‘이만한 마법을 사용하면서도 마도구의 힘을 받지 않았다고?’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완드와 같은 전용 장비가 필수불가결하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초인적인 존재들조차 완드를 들고 다니며 기적에 가까운 마법을 행하는데, 엘프는 아무런 장비도 없이 심상만으로 고차원의 원소 마법은 물론이고 결계와 염동까지 사용한 것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수준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꿀꺽.
함타르신의 마음속에 좌절과 절망의 감정이 차례차례 들어서는 와중, 엘프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뭐, 상관없나. 단명종들의 정치 싸움은 듣기 귀찮기만 하고. 이유를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그럼 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가늘게 좁혀진 엘프의 눈이 함타르신에게 닿는다.
“아무래도 죽이는 건 곤란하지. 그 시점에서 내 유희가 끝나고 말 테니까. 안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대답하자. 함타르신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방치했다가는 또 이런 일이 발생하겠지. 그러니까 표식을 하나 새겨둘게.”
등허리에 따끔거리는 감각이 느껴진다. 함타르신이 당황하자 엘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나는 언제든지 너를 죽일 수 있어. 관념을 신이라 믿는 나부랭이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저, 저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함구하라는 말씀으로 받들겠습니다.”
“그래. 이해가 빨라서 좋네.”
딱! 엘프가 손가락을 튕기자 비틀리고 꺾였던 손가락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함타르신은 자신의 몸에 일어난 기적을 살필 새도 없었다. 엘프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고해소의 문을 열고 나가. 테오라드 앞에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 살고 싶다면.”
“며, 명심하겠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함타르신이 고해소의 문을 열고 나갔다. 숨통이 트이는 것도 잠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테오라드가 보이자마자 함타르신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 이단 심판관. 심문은 잘 끝냈는가?”
복장이 단정하고 용모가 수려하다. 몸짓과 말투, 구김살 없는 미소에는 선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함타르신은 테오라드가 더 무서웠다.
‘저 이면에서 수백 마리의 뱀이 꿈틀거리고 있겠구나.’
상대를 얕잡아 본 자신의 완벽한 패착이었다. 하긴 눈앞의 사내는 7대째 이어져 온 명문가의 당주. 테오라드가 권모술수에 능할 거라는 건 미리 짐작하고 있어야 할 부분이었다.
“예. 심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시선을 마주보고 있기가 버겁다. 테오라드의 턱을 보며 대답한 함타르신은 바쁜 걸음걸이로 교회당을 가로질렀다.
“이단 심판을 모두 끝마쳤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발걸음이 빠르다. 함타르신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테오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결과도 말해주지 않고.’
잘은 모르겠지만 엘프와의 대화를 통해 진실을 목격한 것 같았다. 가동 석판까지 전해줬으니 그걸 가지고 가서 주교에게 내 무죄를 주장하고 저택의 사정을 말하겠지.
‘잘하면 정말로 교단의 기사단이 저택에 지원을 올 수도.’
그렇게만 되면 엘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힘내게! 나는 자네를 믿고 있어!’
테오라드는 점차 멀어지는 함타르신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응원을 보내었다.
*
균형의 교단 제국 중부 제 5 교구.
교구장 주교 레비함의 교계(教诫) 집무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서류에 파묻혀있던 레비함이 고개를 들었다.
“아. 예.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며 함타르신이 들어온다. 레비함이 깃펜을 놓고 미소를 지었다.
“이단 심문을 마치고 돌아온 길이시군요.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그보다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네. 데하름 자작가에 정말 이단이 있던가요?”
잠시간의 침묵. 함타르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단순한 착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데하름 자작가에는 이단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보다 더 신실한 곳이었으니까요.”
“으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따로 드릴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주교님.”
“그래요. 피곤하셨을 텐데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예.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함타르신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을 나섰다. 그때까지 미소를 짓고 있던 레비함은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단 심판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초췌한 눈두덩이, 메마른 입술,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 잔뜩 지친 발걸음, 미묘하게 떨리는 억양,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떨리는 동공.
그 모든 것들이 이단 심판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거짓말을 가장 큰 죄악으로 삼는 이단 심판관이 거짓을 고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일반적인 흐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건 곧 데하름 가문이 이단 심판관을 심적으로 굴복시켰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함타르신은 주교인 레비함이 인정할 정도로 신실한 신자이자 사제였다. 그런 사람이 가문의 권력에 억압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하면 아무래도 가문의 당주인 테오라드가 이단 심판관에게 무슨 수를 썼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테오라드가?’
선심을 타고난 인물이 무슨 연유로 이단 심판관을 핍박했단 말인가. 미간을 좁히며 골몰하던 레비함이 책상에 쌓인 서류들 중 하나를 꺼내들어 펼쳤다.
교구 인근 귀족들의 인적사항과 교단을 대하는 태도를 집필한 인명(人名)책이었다. 종이를 몇 번 넘기던 레비함은 어렵지 않게 테오라드 데하름의 항목을 찾아내었다.
『테오라드 데하름』
[위험 수치 : 6등급. 자애를 베풀기를 망설이지 않음. 교단에 매우 우호적. 성정이 착하여 영지민들의 신망이 두터움.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에도 적이 없을 정도.]
현 주교인 레비함이 보좌주교로서 전대 교구장을 보필하던 시절, 전대 교구장이 남긴 기록이었다. 레비함은 이 기록을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본 테오라드는 기록에 적힌 그대로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삼 년 전쯤이었나.’
봄비가 추적추적 내려 만물을 적시던 시기였다. 그때 시장에 볼 일이 있어 거리로 나왔던 레비함은 골목길에서 우연찮게 테오라드를 발견하였다.
그때 반갑게 인사하려던 레비함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고 몸을 숨겼었다. 테오라드가 바닥에 주저앉은 웬 부녀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녀자의 품에는 갓난아이가 꼭 안겨있었다.
─ 강도의 얼굴은 기억나나? 네 남편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고 하지 않았나.
─ 흐윽, 복면을 쓰고 있어 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 죄송할 것도 많다. 바보처럼 굴지 말고 네 이름을 말하라.
─ 하리아. 하리아 다르닐이라 합니다.
─ 좋다. 하리아.
테오라드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변의 물웅덩이가 비단옷을 엉망으로 물들였으나 테오라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옷에 오물 한 방울이 튀어도 윽박을 지르는 여타 귀족들이 한심해 보일 정도로 테오라드의 행동은 고귀하였다.
─ 나는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불타는 집을 보았고, 죽은 네 남편을 보았다. 네 말을 믿는다는 소리다. 몇 년이 걸리든 범인은 꼭 잡아주마. 그리고.
테오라드가 목의 브로치를 떼어내었다. 놀란 부녀자가 눈을 크게 떴으나 테오라드는 개의치 않았다.
─ 이걸 줄 테니 귀중품 가게에 팔아서 생활을 이어가도록 해라. 아이에게 젖을 물릴 여유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 나, 나으리! 받을 수 없습니다!
부녀자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금화 한 닢 정도면 모를까 저 값비싼 브로치는 평민이 삼 년 동안 부유하게 먹고 살아도 될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테오라드는 당연한 것처럼 부녀자의 손에 브로치를 쥐어주었다.
─ 받거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 저 같은 것이 어찌…….
─ 귀천은 목숨 아래에서 평등하다. 너 같은 것이기에 주는 것이 아니라 너이기에 주는 것이다. 은혜는 생존으로 보답하거라.
그리 말한 테오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부녀자가 고맙다는 말을 연이어 중얼거리며 울음을 터트리던 것이 눈에 선하다.
‘틀림없는 성인(圣人)이었다.’
저도 모르게 감동을 받을 정도의 선행. 당시의 레비함은 테오라드에게 존경의 감정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이단 심판관을 핍박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혹시 그 모든 것이 연기였나? 보좌주교였던 자신이 시장에 나온 걸 미리 알아채고 선행을 행한 것인가? 교단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흐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의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단 심판관이 데하름 가문에 굴종하고 말았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잠시 고민하던 레비함은 인명책에 적힌 테오라드의 기록을 수정하였다.
『테오라드 데하름』
[위험 수치 : 4등급. 이단 심판관을 굴복시킬 정도의 간계(奸计)를 가지고 있음. 현재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주의를 요망함.]
언젠가 저택에 직접 방문하여 진실을 파악하리라. 생각을 마친 레비함은 인명책을 덮고 원래의 업무로 돌아갔다. 테오라드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기에는 도맡아서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아침은 보다 상쾌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교목의 잔가지를 헤집고 창가에서 흘러들어오는 햇볕이 빛의 커튼마냥 너울거린다.
음유시인들이 자주 쓰는 구절을 빌리자면, 그래. 세상이 오색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빛의 신께서 나를 축복하시는구나.’
방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중정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인간의 힘으로 일궈낸 중정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마음에 안정감을 전해준다. 아직까지 폭발의 잔해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침하셨습니까, 아버지.’
옷을 갈아입으며 중정의 중앙에서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께 눈인사를 보냈다.
엘프의 속내를 알아차린 이후로 석상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완벽하게 다르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균형의 교단에서 기사단을 파견해 줄 겁니다.’
함타르신이 엘프의 속내를 깨닫고 돌아갔을 게 분명하니, 교구의 주교를 찾아가 엘프의 위험성에 대해 잘 말해주었을 것이다.
내가 위험하다는 걸 눈치 챈 주교는 교단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보고를 받은 교단은 기사단의 파견을 검토하겠지.
그 과정에서 만에 하나 교황 성하나 성녀 예하께서 나의 고충을 알아주신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교단의 힘을 빌어서 내 저택에 기거하고 있는 극악무도한 엘프를 내쫓을 수 있을 것이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살 구멍은 있나봅니다.’
이 기회는 필시 빛의 신께서 내려주신 것이리라. 평소 계율을 어기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왔던 것이 보답을 받는 기분이었다.
똑똑─
흐뭇한 기분 속에 빠져있는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그쪽으로 귀를 기울인 내가 외투의 소맷단을 접어 올렸다.
“말하라.”
“아침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가주님.”
“곧 가도록 하지. 주방장에게 말을 전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사용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나는 평소대로 몸단장을 한 다음 목에 브로치를 착용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내게 부복한 채 뒷머리를 보이고 있는 엘프였다. 바로 앞에는 개밥그릇이 놓여있었는데, 그 위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음식물 쓰레기들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이해가 안 되네.’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 걸 왜 이렇게 고집하는 거지. 아무리 이게 매도의 일환이라고는 해도 좀 너무하다 싶었다. 먹는 건 엘프인데 괜히 내 비위가 다 상한다.
내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다가가자 발소리를 들은 엘프가 와들와들 떨면서 목소리를 흘렸다.
“조, 좋은 아침이에요 주인님…….”
“그래. 방금 전까지는 좋은 아침이었지. 그런데 네 몰골을 보니 기분이 싹 가시는구나. 불쾌한 것도 정도껏이지.”
“너, 너무해여어…….”
옅게 흐느끼는 엘프를 무시하고 식탁의 앞에 앉았다. 내가 수저를 들자 엘프는 당연한 것처럼 개밥그릇 위의 음식물 쓰레기들을 핥아먹기 시작했다.
“게걸스럽게도 처먹는군.”
억지로라도 실소를 머금은 나는 고개를 돌려서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잘라내었다. 포크로 찍어 한 입 베어먹으니 고기의 육즙이 고소한 버터 향을 머금으며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육질도 너무 질기지 않고 부드러워서 씹는 맛이 있었다. 내 말을 오해한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솜씨를 발휘한 것이리라.
조금 미안해지긴 해도 결과적으로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 음식의 절반정도를 해치웠을 때 근처에서 켁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엑, 헤으으…….”
음식물 쓰레기를 먹다가 사레가 들린 건지, 엘프가 눈을 반개한 채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고 가녀린 몸은 처연하게 떨린다. 누가 봐도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 걸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라고 할까?’
아무리 이게 매도의 일환이라지만 먹는 걸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엘프도 이걸 싫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마친 내가 먹다 남은 스테이크를 들고 엘프에게 걸어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힘겨워하던 엘프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게 닿는다.
“값비싼 항아리를 깨트린 벌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스테이크를 권하려던 나는 엘프의 낯빛이 서늘하게 변함을 느꼈다. 헛숨을 들이킨 내가 재빨리 행동을 수정하였다.
“그 보상으로 특식을 주도록 하마.”
접시를 비스듬히 내려 음식물 쓰레기 위에 스테이크를 떨어트렸다. 그제야 엘프의 낯빛이 화하게 변한다.
다행이다. 나는 거드름을 피우며 접시를 근처에 내팽개쳤다.
“특별히 내가 먹던 음식을 처리하게 해주겠다. 천박한 암캐에 불과한 네 년에게 있어서는 과분할 정도의 보상이지. 그렇지 않은가?”
“하, 하지만. 배불러서 더는 못 먹어여……!”
“네 사정을 내가 신경 써야 하나? 아니면, 예전처럼 또 몰매를 맞고 싶은 모양이지?”
“히에엑! 죄, 죄송합니다아……!”
엘프가 기겁하며 개밥그릇에 얼굴을 처박았다.
“헤윽. 후윽…….”
대수림의 고귀한 엘프가 개밥그릇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있다니. 그것도 스스로가 자처해서 말이다.
그 기괴한 광경을 한동안 내려다보던 내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인이 원한다는데 괜찮겠지.’
괜히 참견을 했다가 엘프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면 나만 곤란해질 뿐이다. 나는 엘프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노골적으로 혀를 차면서 식당을 나섰다.
복도를 가로질러 앞뜰로 나오자 청명한 하늘이 나를 반겨준다.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세상에 행복을 안겨다주고 있었지만, 내 기분은 착잡할 뿐이었다.
‘아니, 이걸 왜…….’
엘프가 가지를 엉망으로 잘라놓은 백향목서(白香木犀)를 눈앞에서 보니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였다.
데하름 가문의 당주가 된 날, 친분이 있는 상인에게서 받았던 귀중한 선물이었는데. 남부 다도해에서 공수한 아름다운 관목이여서 그 가치가 높은 건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었는데…….
‘망할 엘프가…….’
지금은 그저 볼품없는 관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테오라드 2세라는 이름까지 붙여주며 애지중지 관리해왔던 나무가 엘프의 장난질 한 번에 아름다움을 잃고 만 것이다.
수관이 황폐해진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 한 편이 아려온다. 동병상련이라 하던가. 이 나무가 현재의 내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괜히 울컥한 감정이 들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꾹 참아내거라. 이 저택에 교단의 기사단이 오는 순간 저 간악한 엘프는 마땅한 벌을 받을 테니까.’
나무에게 하는 건지 스스로에게 하는 건지 모를 위로를 건네고 있을 무렵, 저편에서 마차의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자 저택의 정문을 향해 다가오는 사륜마차가 보였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 워! 워!
마부의 호령과 동시에 마차가 저택의 정문에 깔끔하게 멈춰 선다. 멍하니 그 옆면을 바라보던 나는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펠가로인 백작가.’
날개를 펼친 백조가 양각되어 있는 마차의 옆면을 보니 백작 각하께서 보내신 마차가 분명하였다.
침을 꿀꺽 삼킨 내가 복식을 가다듬고 가까이 다가가자, 마부석에 있던 기사가 아래로 뛰어내려 내게 예를 표했다.
“테오라드 데하름 가주님.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널찍한 등과 우락부락한 몸을 보니 장골임이 분명하다. 사내대장부라는 말이 썩 어울릴 정도의 외양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내는 아니었다.
흉갑의 가슴 쪽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것을 보면 여기사가 분명하였다. 거기다 흉갑의 어깨 쪽에 새겨진 푸른 깃발을 보니 기사단 출신의 기사였다.
‘여자가 기사단을 거쳐 기사가 되었다라.’
소속된 가문의 권세가 드높거나 실력이 엄청난 게 분명하다. 하긴 백작 각하께서 내게 호위를 맡으라며 보낸 기사다. 어중간한 실력자는 절대 아니겠지.
“반갑네. 내가 자네를 무어라 부르면 되겠는가?”
“편하게 마르한이라 불러주십시오.”
“그래, 마르한. 백작 각하께서 자네를 파견한 이유가 무엇인가?”
“테오라드 데하름 가주님을 섭정 각하로서 성으로 모시기 위함입니다.”
섭정 각하라.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호칭이다.
“백작 각하께서 황도로 올라가신 모양이지?”
“예.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리지는 바람에 미리 서신을 보내지 못한 점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이다. 봉신의 의무를 지고 있는 입장에서 권리를 우선할 순 없지. 내 바로 짐을 들고 올 터이니 여기서 기다리거라.”
마르한이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섭정 각하. 그리 서두르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만.”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러네. 길어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 대기하고 있게.”
“뭐…… 알겠습니다.”
“금방 오지.”
마르한에게 미소를 지어준 내가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괜히 입 꼬리가 히죽거리고 발걸음에 잔망스러움이 깃든다.
‘당분간 엘프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리잖아, 이거!’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
정말로 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내가 짐을 들고 마차로 돌아왔다. 도중에 저택 청소(엘프의 오전 일과 중 하나)를 하고 있는 엘프를 마주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말이다.
“짐은 저한테 주십시오.”
“그러지.”
내게로 다가온 마르한이 짐을 넘겨받는다. 마부석으로 빠르게 걸어간 마르한은 짐을 마차에 고정시킨 다음 마차의 문을 열 준비를 마쳤다.
나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그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머릿속은 온통 꽃밭이었다.
‘성으로 가면 엘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까, 에실리에게 내 상황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겠지.’
그럼으로 오해를 풀고 예전과 같은 관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 내게 호의적으로 변한 에실리와 성에서 알콩달콩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거기다 성에서 체류하는 시간 동안 교단에서는 기사단의 파견을 검토할 테니 일석이조.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거 아닌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고생 끝에 낙이 오긴 오는구나. 하긴 그동안 엘프의 패악질에 얼마나 휘둘렸던가. 이제 좀 편하게 휴가를 보내고 올 때가 되긴 하였다.
‘고생했어, 나.’
눈가에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내며 걸어가자 마르한이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고맙네.”
웃으며 인사를 보낸 내가 마차에 탑승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주인니임…….”
엘프가.
마차의 좌석에 엘프가 앉아있었다.
‘왜……?’
대체 왜 엘프가 나보다 먼저 마차에 타고 있다는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머릿속의 꽃밭을 뛰어다니고 있던 내 분신이 드래곤의 형상을 한 엘프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식은땀이 흐르고 동공이 파르르 떨리는 와중에 마르한이 가까이 다가와서 너스레를 떨었다.
“섭정 각하께서 아끼시는 노예라 들어 제가 따로 데려왔습니다. 제가 비록 여자이기는 하나 남자의 생리에 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습니다. 성에서 적어도 일주일은 체류하셔야 할 텐데 간간히 성욕을 푸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마르한을 보고 있자 뒷목이 당겨온다.
‘뭘 실실 쪼개고 있는데 이 새끼야……!’
왜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지랄인데! 왜! 대체 왜 그런 건데!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내 체통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겨우내 화를 죽이며 목의 브로치를 매만졌다.
“마르한. 내가 백작 각하의 대리 역할을 수행하는 게 맞나?”
“예?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백작 각하의 대리로서 첫 번째 명령을 내리도록 하지.”
분노로 떨리는 손을 든 내가 마르한을 노려보며 이를 빠득 깨물었다.
“너는, 무조건 사형이다.”
“……예?”
마르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인다. 자신은 선의를 보였을 뿐인데 느닷없이 ‘너 사형’이라는 말이 나오니 인지부조화가 온 탓일 것이다.
하나 일방적인 선의는 때로 무례함이 된다. 마르한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엘프랑 동행해야 하는 내 처지가 딱 그렇다.
“어, 음. 조금 갑작스럽습니다만…….”
굵은 눈썹을 사선으로 내리며 생각에 잠기던 마르한이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혹시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장난입니까? 제가 그쪽 방면으로 천치인지라 바로 반응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뒷목을 긁으며 머쓱하게 웃는 마르한을 보고 있으니 화를 더 내기도 뭐하다.
하긴 엘프 노예를 동행시켰다고 사형이라니, 역지사지로 생각해봐도 터무니없는 말이다. 엘프의 정체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장난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정상이었다.
“장난…….”
나는 부들거리는 손을 내리며 애써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래. 장난이었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하도록 해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앞으로는 행동에 독선을 가지지 마라. 내가 백작 각하의 대리로서 있는 동안에는 특히나.”
“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마르한이 가슴에 손을 얹는 것으로 깍듯하게 군례를 올린다. 나는 군례를 대충 받아준 다음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문 닫겠습니다. 섭정 각하.”
끼익─ 철컥.
마차의 문이 닫히고.
“그럼 출발토록 하겠습니다!”
마르한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내달렸다. 마차의 옆에 난 작은 창에서 보이는 풍경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걸 보니 꽤나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더 빨리 갈 수는 없나.’
지금도 충분히 빠르지만 전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내 바로 옆자리에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랐지만 노예를 자처하는 제정신 아닌 엘프가 있었으니까.
밀폐된 공간에 단 둘이 있으니 괜히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도주 경로가 없다는 건 사람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니.
그래도 티를 내서는 안 된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엘프를 흘겨보았다.
“…….”
엘프는 프릴이 달린 메이드 정복을 잘 차려입고 있었다. 머리칼도 보다 단정하게 다듬은 상태에다, 머리의 오른편에는 붉은 리본까지 매달고 있어서 언뜻 보면 노예가 아니라 가주인 내게 귀여움을 받는 하녀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평소 넝마나 마찬가지인 옷들을 즐겨 입던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깔끔해진 외양. 마르한이 노예를 데려가려하자 내 품위를 신경 쓴 하비드가 노예에게 이것저것 챙겨준 것이겠지.
‘확실히…… 예쁘기는 하네.’
넝마를 입고 추잡스러운 행동을 할 때에는 예쁘다는 감상을 쉬이 할 수 없었지만, 가볍게 꾸미기만 해도 뭇 남성들의 소유욕을 불태울 정도의 매력이 있었다.
성격만 좀 온순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낮게 한숨을 내쉰 내가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좌석에 등을 기대었다.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바람이 조금 차다. 창문을 닫은 내가 헛기침을 하며 엘프의 주의를 끌었다.
“성에 도착하려며 시간이 꽤나 걸릴 테니 쪽잠이라도 청해라.”
“주인님?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네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이다. 나는 다른 곳도 아니고 펠가로인 백작가에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네가 돼먹지 못한 꼴을 보이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나?”
엘프의 한 쪽 눈썹이 꿈틀거린다. 지금 내 말은 마차 안에서 아무런 매도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으니 화가 날 만도 하다.
그러나 물러날 생각은 없다. 섭정의 임무를 맡은 이상 엘프에게 더는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백작 각하의 대리 역할을 수행할 동안은 말이다.
“체면…….”
작게 웅얼거린 엘프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주인님.”
의외로 금방 수긍하네. 혹시나 귀찮게 굴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안도의 감정을 느낀 나는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내 말마따나 성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니 잠이라도 청할 요량이었다.
*
닫힌 창문을 뚫고 나지막이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스르르 눈을 떴다. 이따금 덜컹거리던 마차가 미동도 없이 완전히 멈춰 선 것을 보니 성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소리 없이 하품을 한 내가 졸린 눈을 비비기 위해 손을 들려다가, 내 손이 무언가에 잡힌 듯 고정되어 있는 느낌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뭐지?’
불길함에 온몸의 솜털을 곤두선다. 몽롱한 기운이 싹 달아다는 것을 느끼며 옆을 돌아보자, 엘프가 내 손목을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앗, 하앙. 주인니임…… 이런 곳에서 갑자기이…….”
문제는 내 손이 위치한 곳이 엘프의 팬티 속이라는 것이다.
‘어? 무슨……?’
잠에서 막 깬 참이라 상황 파악이 재빨리 이루어지지가 않는다. 내 손이 왜 엘프의 팬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인가? 거기다 엘프가 내 손을 가만히 놔두는 것도 아니었다.
“흐윽, 주인닝…… 그만 괴롭혀주세여어…….”
내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게 만들면서 의도적으로 손가락을 자신의 음부에 비비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자그맣게 튀어나온 돌기가 손가락의 끝자락에 걸리는 게 느껴졌다.
묘하게 미끈거리면서도 부드럽고 촉촉하다. 이게 대체 뭔가 생각하던 나는 야트막한 깨달음에 모공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음핵?’
예전에 ‘음란한 홉고블린 메이드’라는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음핵은 남성의 음경과 비슷한 여성의 발기기관이며 오직 쾌감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신체 기관이라고.
그러니까 이 엘프는, 지금 내 손을 일종의 자위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마차가 막 멈춘 시점에서 말이다.
‘이 간악한 엘프가……!’
내가 마차에서 매도를 해주지 않고 바로 잠을 청한 것에 대해 복수를 하는 것이리라. 의도가 너무 명확해서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어떻게든 손을 빼내려고 하지만 엘프가 손목을 꽉 붙잡고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내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을 무렵, 똑똑- 노크 소리가 내 신경을 배로 곤두서게 만들었다.
“섭정 각하. 도개교에서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나와보셔야 할 것 같아서…….”
당연한 일처럼 문을 연 마르한의 표정이 굳는다. 마르한의 입장에서는 내가 ‘엘프의 팬티 속에 손을 넣고 주물럭거리는 철없는 귀족’이나 마찬가지로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크나큰 오해다! 내가 설명하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그보다 먼저 엘프가 간드러지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햐으응. 주인니임…… 계속 이러시면 주인님의 천박한 암퇘지는 느껴버리고 말아엿…….”
굳어있던 마르한의 표정에 혐오 한 줌이 들어선다. 마르한은 나랑 엘프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석연찮게 말을 내뱉었다.
“저, 성욕을 해소하시는 건 좋지만 조금은 참아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런 행위는 야외가 아닌 개인적인 공간에서, 낮이 아닌 밤에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오, 오해다!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저는 입이 무거운 편이라서요.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더없이 무미건조한 말. 나를 완전히 파렴치한 귀족으로 여기는 썩은 눈동자가 마음에 대못을 박는 것만 같았다.
좋은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던 내가 어벙하게 굴자 마르한이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보다 일단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섭정 각하를 기다리시는 분이 있습니다.”
“아, 알겠네.”
대답하며 엘프를 쳐다보자, 이정도면 되었다는 듯 엘프가 내 손목을 놔주었다.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감도는 것을 보면 어떻게 봐도 고의였다.
‘망할.’
부아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엘프의 팬티에서 손을 빼낸 나는 손가락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애액을 손수건으로 대충 닦아내었다.
손수건을 도로 품에 넣고 마차에서 내리자 미형의 남성이 말에 탄 채로 나를 반겨주었다.
“매제!”
자유분방하게 입은 튜닉에 정리하지 않아 헝클어진 금발. 호쾌한 성격의 그는 에실리의 친오빠이자 백작가의 차남인, 며칠 전 내게 편지를 썼던 프레드였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앞으로 성큼 걸어가서 예를 표했다.
“프레드 공자님! 오랜만입니다.”
“하하. 공자는 무슨. 편하게 형님이라고 부르게. 곧 내 여동생과 결혼할 사이지 않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직 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펠가로인 백작가에 무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네는 여전히 고리타분하군. 그 고리타분한 면모가 마음에 들지만 말이야.”
프레드의 시원한 미소에 나 또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그보다 공자님께서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요 주변에서 바람이나 쐴 겸 나왔다가 자네가 오고 있다기에 말 머리를 틀었네. 겸사겸사 말도 전하고 싶었고 말이야.”
“전하고 싶은 말이라 하시면?”
“오늘 저녁에 별채에서 간단한 환영회가 있을 걸세. 자네가 섭정의 역할을 처음으로 수행하는 기념비적인 날이지 않나.”
환영회라니. 내게 과분한 처사다.
“그러실 필요는……. 저는 고작해야 일주일 정도를 머무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양하지 말게. 아버지께서 매제를 극진히 대접하라 하였기에 그리하는 것뿐이니. 아버지도 나도, 어린 나이에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자네를 동정하며 응원한다는 걸 명심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해주고. 그…….”
주변의 눈치를 보던 프레드가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더니 작게 속닥거린다.
“연애 관계도 말이야. 내가 매제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았으니 성심성의껏 조언해 줄 수 있어. 그러니 부담가지지 말아.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매제라면 내 여동생을 내어줘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말이야. 솔직히 말해 자네가 좀 더 아까울 지경이네. 물론 이건 에실리에게 말하지 말게나. 삐지면 생각보다 오래가는 성격이라.”
프레드가 작게 키득거리며 몸을 들어올렸다. 프레드의 이런 격의 없는 태도가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에실리는…….”
말하기 무섭게 뒤에서 백마 한 마리가 달려온다. 새하얀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 위에는 사이드 새들을 이용하여 옆으로 걸터앉은 에실리가 있었다.
찬연한 금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니 연심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근처까지 다가온 에실리는 뚱한 표정으로 말고삐를 잡아당기더니 프레드를 새침하게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승마를 가르쳐주겠다면서 먼저 달려나가시면 어떻게 해요?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서 한참이나 찾았잖아요.”
“고의는 아니었어. 그보다 화는 좀 죽이지.”
“제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요? 경마를 하고 싶으면 저 말고 가신 기사들을 데리고 나갔으면…….”
뒤늦게 인기척을 느꼈는지, 에실리가 말하다 말고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맑은 바다와 같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지면서 입술이 살며시 벌어진다.
“테오라드 경?”
귀여운 반응 덕분에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
좀 전부터 뒤편에서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엘프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는 게 이토록 통렬한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거였나.
엘프가 언제 마차에서 내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등허리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굳이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에실리 앞에서 재차 추태를 보였다가는 내 입지가 말도 안 되게 추락할 것이다.
거기다 나는 에실리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 이것이 사랑의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실리를 만날 때마다 충족감이 차올라 하루가 행복해지곤 하였다.
그러니 잃고 싶지 않았다. 엘프가 이 이상 내 인간관계를 파탄 내게끔 놔두지 않겠다는 소리다.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에실리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이오. 에실리 영애.”
“예. 그런데…….”
떨떠름하게 대답한 에실리가 내 뒤편의 엘프를 응시한다. 슬쩍 옆으로 빠져서 엘프를 흘겨보니, 엘프 또한 에실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히잉…….”
몸을 움츠리고 입매를 내리는 것으로 겁먹은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두 눈만은 에실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
얼음장 같은 침묵이 이어진다. 에실리가 철저하게 무감정한 표정으로 엘프를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테오라드 경.”
한동안 엘프를 살피던 푸른 눈동자가 이번엔 내게 향한다. 내가 흠칫 놀라며 마주보자 에실리가 저조한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예전에 봤던 엘프 노예를 데려오셨군요.”
내가 데려온 게 아니라고, 에실리!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관계로 속으로만 삭였다.
“그, 그렇네. 혹시 내가 실례가 되는 짓을 한 건가?”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테오라드 경이 노예를 데리고 다니는 것에 제가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니까요. 식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주제넘은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무덤덤한 어투가 내 마음을 아파오게 만든다. 진심을 토해낼 수 있으면 정말로 좋으련만.
내가 억울한 심정을 억누르며 겨우내 미소를 유지하고 있을 무렵, 프레드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손뼉을 쳤다.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킬 요량이었다.
“하하! 저 노예가 아무리 예쁘다지만 질투는 그만해라 에실리. 매제가 곤란해지는 건 물론이고 체통에도 어긋나지 않으냐.”
“질투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왜 그렇게 시야가 좁아요?”
“아니긴. 거짓을 말하려거든 품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부터 살펴라. 네 얼굴에 서린 표독스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아니, 그게…….”
에실리의 양 뺨이 미약하게 붉어진다. 에실리는 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낮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무튼 테오라드 경. 오늘 저녁에 별채에서 무도회가 열릴 예정이니 괜찮으시다면 참석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아. 프레드 공자님께 들었다. 별 일이 없는 한 필히 참석하도록 하지.”
“좋아요. 오라버니?”
알게 모르게, 에실리가 팔꿈치로 프레드의 팔을 툭 쳤다. 프레드는 그걸 신호로 알아들은 모양인지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자네 앞이라서 에실리가 부끄러움을 타는 모양이야. 우리는 마저 산책을 하겠으니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 집무에 대한 기초적인 사항을 전달받도록 하게.”
“예? 공자님께서 저와 같이 집무를 보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미안하네. 나는 통치에는 영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 수렵이라면 모를까 가문의 골치 아픈 일들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말게. 매제의 호위를 맡았던 마르한이 성심성의껏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줄 테니 말이야.”
“정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은 내가 정중하게 예법을 취하자 프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보세.”
프레드가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가볍게 투레질을 한 말이 마차를 지나쳐 도개교를 건넌다. 에실리 또한 프레드를 따라 말을 몰았다.
프레드의 투박하고 저돌적인 승마와는 달리 에실리는 침착하고 우아하게 말을 몰고 있었다.
“오라버니─! 장난치지 말고, 속도 좀 줄이라니까요!”
……아무래도 실력은 프레드 쪽이 우위인 것 같았지만.
“섭정 각하.”
멀어지는 에실리를 망연히 쳐다보고 있으니 마르한이 다가와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엘프를 힐끔 쳐다본 내가 마차에 다시 올랐다. 엘프가 뒤따라 들어와서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는 엘프를 보고 있으니 괜히 소름이 끼쳐왔다.
“…….”
에실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궁금하다면, 엘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무서웠다…….
*
백작 각하의 집무실.
“성에 체류하시는 동안은 이곳에서 집무를 보시면 됩니다.”
마르한의 안내를 받으며 집무실에 도착한 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엄청나네.’
백작령을 통치하는 펠가로인 백작가의 당주가 이용하는 집무실이라 그런지 방은 무척이나 넓고 고풍스러웠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게 있다면 집무 책상의 양쪽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탁상기였다.
왼쪽에 있는 것은 백작 각하가 팔년 전 오크 정벌 전쟁에 참여하여 황제 폐하에게 직접 수여받은 종군 탁상기로, 황실을 상징하는 백사자가 자수되어 있었다.
오른편은 펠가로인 백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탁상기. 전통과 고급스러움이 한껏 묻어나왔다.
가문의 위상이 절로 돋보일 정도의 공간. 이런 곳에서 집무를 보게 된다니 괜히 마음 한 편이 웅장해진다.
“내가 이런 곳에서 집무를 봐도 되겠는가?”
감격에 겨워 말을 전하니 마르한이 겸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각하의 대리시니까요.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십니다.”
“아니. 마땅하지는 않네. 원래라면 프레드 공자께서 주 업무를 보고 내가 보조를 맡아야 하는 게 정상이니 말이야. 아무리 섭정이라고 해도 나는 이번이 처음이지 않나.”
“그것이…….”
나는 고개를 돌려 우물쭈물하는 마르한을 쳐다보았다.
“프레드 공자께서 팔 년 전부터 가문의 일에서 손을 놓으셨다고 들었네. 역시 오크 정벌 전쟁 당시에 작고하신 베넬러 공자님의 영향 때문인가?”
의표를 찔린 것처럼 마르한이 멈칫한다.
머뭇거리는 입술을 보아하니 말을 조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이 이상으로 추궁할 생각이 없었기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걸세. 베넬러 공자께서 천국에 들지 못하신다면 천국은 없는 것만 못한 것이니.”
“예. 빛의 신께서 천국에 자리를 마련해주셨을 겁니다.”
나와 마르한 사이에 때늦은 엄숙함이 내려앉는다. 이렇게 무게를 잡을 생각은 없었는데.
머쓱하게 숨을 들이쉰 내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보다 인수인계를 받고 싶은데. 내가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이라도 있나?”
“아. 영지의 관리 쪽은 평소대로 돌아가고 있으니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일주일 사이에 문제가 생길 리는 없을 테니까요. 다만…….”
“다만?”
“최근 약 한 달 동안 ‘십인의 의적’들이 기승을 부려서 백작 각하께서 곤란해하시던 참이었습니다.”
십인의 의적이라면……. 언뜻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백작령의 귀족들을 노려 강도짓을 일삼는 녀석들이 아니던가?”
“예. 헌데 이놈들이 강탈한 재산의 일부를 영지민들에게 뿌리는 터라 곤란한 게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해하네. 영지민들에게 공조를 요청하기가 힘들겠군. 놈들의 본거지를 파악하려고 해도 영지민들이 쉬이 알려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예? 아, 그렇습니다. 놈들에게 은혜를 받은 일부 영지민들이 의적이라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통에 수사가 원활하게 진행되지가 않습니다. 무엇을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하니 원…….”
간단한 이야기다. 귀족들의 돈을 강탈한 의문의 집단이 돈의 일부를 영지민들에게 뿌림으로서 수사에 난항을 겪게 만드는 것이다. ‘의적’이라는 타이틀은 영지민들의 마음속에 영웅처럼 자리를 잡고 있을 테니까. 영지민들은 알게 모르게 수사에 협조를 하지 않겠지.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범죄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악행이며 이기적이고 계획적인 선행이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했다.
“내가 한 번 알아보겠네. 범죄가 일어난 지역을 표시한 지도와 영지민들의 증언을 취합한 자료가 있으면 가져와주게. 그리고…….”
“섭정 각하.”
필요한 문서를 몇 개 더 말하려는 참에 마르한이 말을 끊는다. 왜 그러나 싶어 쳐다보자 마르한이 곤란한 낯빛으로 말했다.
“마음이 급하신 건 알겠으나 오늘만은 집무를 등외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녁에 있을 환영회에 참석하시려면 지금부터 복장을 손보시고 출발할 채비를 갖춰야 할 테니까요.”
“아, 음.”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에실리가 무도회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하기도 했고. 잠시 고민하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단, 노예는 대동하지 않을 생각이니 내가 데려온 노예에게는 이 사실을 전하지 말게.”
“존명을 받듭니다. 그럼 마차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척. 군례를 올린 마르한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괜히 뺨을 긁적였다.
‘환영회라.’
시끌벅적한 공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에실리에게 내 무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내가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에실리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긴장이 돼서 자꾸만 손이 떨린다.
*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에 성 밖으로 나오자 마부가 사륜마차를 대동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호위는 두지 않았다.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섭정 나으리.”
“고맙네.”
마부에게 눈인사를 한 내가 마차에 탑승하였다. 좌석에 앉아 옷소매를 털고 있으니 마부가 문을 닫아준다.
나는 복장을 한 번 더 점검한 다음 자신감을 가지고 좌석에 등을 기대었다.
‘엘프가 없으니 에실리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겠어.’
그동안 엘프의 눈치를 본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이번에는 엘프가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끔 남몰래 마차를 준비했으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왜 출발을 안 해?’
의아한 마음이 들어 마부석 쪽을 툭툭 두드렸다.
“이봐. 왜 출발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인가?”
“예? 나으리의 노예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서…….”
“뭐?”
무슨 개소리야 그게? 당황한 내가 창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었다. 뒤쪽을 살펴보자 마부의 말처럼 엘프가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손에 든 은쟁반에 다과까지 준비한 채로 말이다.
‘미친……!’
마르한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 말을 두 번이나 무시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럼 누가?’
혹시 저 엘프는 내가 성을 나설 때까지 기다렸던 건가? 소름이 우수수 돋는 바람에 내가 기겁하며 마차를 두드렸다.
“출발, 출발하게!”
“예? 노예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상관없으니 그냥 출발하라고!”
내 윽박에 어리둥절하던 마부가 말고삐를 거세게 후려쳤다.
“이랴!”
거칠게 투레질을 한 말들이 앞으로 내달린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엘프는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히익!”
와장창! 찻잔이 바닥에 부딪쳐 깨어지며 홍차가 터진다. 고급스러운 과자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엎어진 엘프의 옷이 삽시간에 더럽혀졌다.
“흐, 흐극…….”
엘프는 처연한 자태로 낮게 흐느끼더니 내게로 손을 뻗으며 애원했다.
“기다려 주세요, 주인니임……!”
기다리긴 개뿔. 널 기다릴 바에야 마계의 일곱 지옥에 가서 마왕이 오기를 기다리겠다. 속으로 혀를 찬 내가 안도하려는 순간, 마차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의아한 바람에 마부를 돌아보자, 마부가 아련한 안색으로 엘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으리.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불쌍하니 그냥 태워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무슨 미친 소리를!
“헛소리 하지 마라! 내가 더 불쌍하다!”
“예? 그게 무슨……?”
“닥치고 말이나 몰게! 당장!”
내가 재차 윽박을 지르자 마부가 흠칫 놀라고는 다시 말을 몰았다. 그제야 안심한 내가 마차 안에 몸을 밀어 넣었다.
‘다행이야.’
후환이 두렵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엘프에게 에실리를 빼앗길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엘프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결심을 굳힌 내가 급박하는 심장을 천천히 잠재웠다.
별채의 특실.
샹들리에 위에서 타오르는 촛불들이 방 안을 밝게 비추고 있었지만, 에실리의 안면에 드리운 그늘까지 밝혀주지는 못하였다.
“오라버니.”
새초롬하게 노려보는 에실리의 모습에 프레드가 낮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왜?”
“왜가 아니잖아요. 그 복장, 아무리 봐도 무도회를 즐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내 복장이 뭐가 어때서 그래.”
테이블의 반대편에 앉은 프레드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인다. 그러나 에실리의 입에서는 한숨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프레드는 두툼한 버프 코트를 입고 허리춤에는 롱소드를 패용하고 있었다. 등에는 쇠뇌까지 매고 있어서 그런지 눈앞의 남자가 사냥꾼인지 귀족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저 복장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에실리의 입장에서는 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또 이상한 곳에 가시려고 그러죠?”
“이상한 곳이라니? 나는 그저 무도회를 즐기다가 술에 꼴아서 젊은 혈기에 취해 수렵을 하러 나가는 것뿐이야.”
“그딴 거짓말을 누가 믿을까요.”
“나는 내 여동생을 믿어. 이번에도 잘 둘러대줄 거라고.”
뭘 저렇게 당연한 것처럼 말해. 프레드를 마뜩찮게 쳐다보던 에실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대신 변명하는 것도 이제 한계라고요. 가신들은 물론이고 사용인들까지 오라버니를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어디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수군거리는 꼴을 내가 봐야겠어요?”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뭐가 어쩔 수 없는 일인데요?”
“그건…….”
프레드가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돌린다. 늘 이런 식이지. 이젠 별 특이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 에실리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솔직히 말하면 오라버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낼 방법은 많아요. 제 눈과 귀가 되어주는 사람이 백작령에 아예 없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프레드의 입가에 얄팍한 미소가 깃든다.
“왜지?”
“오라버니가 지키려고 하는 비밀을 굳이 캐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오. 그건 좀 감동인데. 진심으로 말이야.”
“감동하긴 일러요. 따로 비밀을 캐내지 않아도 저는 오라버니가 밤중에 무슨 짓을 하는지 대충 예상이 가니까요.”
“그래? 그럼 우리 귀여운 에실리의 추측을 한 번 들어볼까?”
“첫째 오라버니의 죽음. 그리고 황제 폐하.”
두 가지 단서를 나열하자 프레드의 입가에 서려있던 미소가 사라진다. 덕분에 에실리의 의심은 확증이 되었다.
“오라버니는 아직도 황제 폐하를 증오하고 있군요. 오크 정벌 전쟁 당시에 일어난 비운의 사건을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죠?”
“에실리.”
“이해는 해요. 저도 황제 폐하가 싫으니까요. 영토 방호를 명분으로 소규모 국지전을 계속해서 자행하는 것이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독선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는 게 이해가 안 되니까요. 그러나 그게 황제 폐하에 대한 증오로 이어져서는 안 돼요.”
“잘못 짚었어.”
“아니요. 제대로 짚었어요. 오라버니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새끼손가락을 떨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가볍게 시작했던 대화가 서서히 무거워진다. 무도(舞蹈)를 즐기기 위해 온 자리에서 할 말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나 에실리는 물러나지 않았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문을 위해서라면 그만두세요.”
“나는 가문을 위해 일하지 않아. 펠가로인 백작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그럼 저랑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펠가로인의 유지를 이어가세요.”
너무나 당당하게 밀어붙이는 터라 빠져나가기가 힘들다. 프레드는 침음을 흘리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건, 나보고 펠가로인의 차기 가주가 되라는 소리야?”
“첫째 오라버니가 천국에 올라가신 이후로 계승 서열상 가장 위에 있으니까요. 오라버니 말고 펠가로인을 이끌 인재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맬던이 있잖아.”
“그 돼지가요?”
제 오빠한테 돼지라니. 프레드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 돼지가 내 남동생이기도 하니까. 문제라도 있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맬던은 가문을 이끌 그릇이 아니에요. 종일 노예들이랑 뒹굴면서 사용인들에게 추태를 부리는 사람이 어떻게 가문을 이끌어요? 맬던은 여성 편력이 곧 자신의 능력이라 믿는 색적광이라고요.”
“음. 확실히 가문을 이끌 인재는 아니지. 그럼 네 누이가……. 아니, 네가 가주가 되면 되겠네.”
장난스런 말소리에 에실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노,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여자인 제가 어떻게 가문을 이끌겠어요?”
“가능해. 우리들 중에 진지하게 가문을 걱정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불가능해요. 가문의 전통을 어겼다고 가신들이 난리를 칠거라고요. 그게 아니더라도-”
“명석하나 어리구나.”
말을 끊은 프레드가 근엄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실리가 퉁명스레 볼을 부풀린다.
“……아버지 흉내는 그만둬요.”
“하하. 미안. 그래도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해두고 싶었어. 가신들은 가문의 전통보다는 가문의 존립을 더 신경 쓸 테니 말이야. 그래야 자신들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지지.”
“무슨 말이에요 그게?”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테오라드를 꽉 붙잡아. 난 그 녀석의 착해빠진 면모만 마음에 들어서 너와의 혼인을 찬성한 게 아니야.”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에실리가 멀뚱히 눈을 깜빡인다. 프레드는 그런 에실리를 향해 몸을 내밀며 테이블을 툭 두드렸다.
“배경. 데하름 자작가의 명성이 네게 어마어마한 권력을 쥐어줄 거다. 영지민들의 지지가 가신들의 입김을 넘어서는 순간, 펠가로인 백작령은 네 손에 들어올 거야.”
은근하고 끈적한 어투에 에실리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는 그런 생각으로 테오라드와 약혼을 한 게 아니에요. 진심으로 사랑…… 아니, 좋아해서 약혼을 한 거라고요. 저를 속물로 보지마세요.”
“까칠하긴. 사랑하는 동생한테 조언하는 오라비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말아줄래?”
“하. 됐어요.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거 같으니까 이만 가봐요.”
“그래야지. 네 복장을 보니 내가 빠져주는 게 좋을 것 같고.”
“뭐가요!”
에실리가 발끈했으나 프레드는 흐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갗에 가까이 달라붙어 몸매를 관능적으로 표현한 드레스하며, 평소에 아깝다고 끼지 않던 비싼 장신구까지 착용한 모습을 보면 누가 봐도 테오라드를 의식하고 치장한 것이었다.
며칠 전에 저택에 내려가서 테오라드와 대판 싸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게 애틋했던 사이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리가 없지.’
여동생의 연애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으니 따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듯했다.
프레드는 오늘 하루 잘 해보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주며 방을 나섰고, 혼자 남은 에실리는 뚱한 표정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낯부끄러운 바람에 혼잣말이 흘러나온다.
이건 어디까지나 무도회에서 품위를 지키려고 입은 것이지 테오라드에게 잘 보이려고 입은 게 아닌데. 적어도 며칠 전 저택에서 보았던 ‘나쁜 테오라드’에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똑똑─
심란한 마음을 삭이는 와중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요.”
에실리가 허락하자 문이 열리면서 앳된 얼굴의 사용인이 들어왔다.
“고귀하신 에, 에실리 영애님……!”
급 높은 존칭에다 부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니 여러모로 안타까웠다. 이주 전에 고용했다던 사용인으로 보였는데, 에실리는 이런 과도한 격식이 꽤나 불편하였다.
“저는 고귀한 사람이 아니니 고귀하다고 말씀하실 필요는 없어요. 편하게 아가씨라고 불러주세요, 파리엘.”
파리엘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영애께서, 아니. 아가씨께서 제 이름을 어찌…….”
“함께 지낼 식솔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거야 당연한 거예요. 그보다 무슨 일로 이곳에 방문하였는지 말을 전해주시겠어요?”
“아, 넵. 실은 방금 전에 테오라드 데하름 자작님께서 별채에 도착하셔서, 그게, 알려드리려는 용무로 이곳에 방문하였습니다.”
테오라드가 벌써? 표정을 굳힌 에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저는 조금 뒤에 내려갈 테니 파리엘은 손님들의 시중을 맡아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아가씨!”
힘차게 대답한 파리엘이 문을 닫고 나간다.
‘분명 그 엘프 노예도 함께 오겠지. 그렇다면…….’
파리엘이 나간 자리를 가만히 쳐다보던 에실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근처의 서랍을 뒤적였다.
테오라드의 진심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