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밀밭 주점의 지하실.
프레드가 로브를 덮어쓴 두 명의 사내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박살난 문 너머로 들어가자 피비린내가 확 풍겨져온다.
반사적으로 코를 틀어막은 프레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널브러진 시체 두 구가 보인다.
‘……머리가 깔끔하게 터졌군.’
신체의 다른 곳을 훼손시킨 흔적은 없다. 원격에서 머리만 박살낸 것이다. 거기다 외부에서 압력을 가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폭발시켰다.
그건 타인의 신체를 제 수중에서 가지고 놀았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법…… 그중에서도 흑마법인가.’
마경의 흑마법사들이 쓰는 공격 마법 중에는, 상대방의 신체에 과부하를 일으켜 심할 경우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통째로 터트린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데.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이런 식의 마법을 운용할 수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테오라드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용한 암살자인가?’
아니다. 기껏해야 강도에 불과한 놈들을 죽이기 위해 이런 고수준의 마법을 사용하는 암살자를 고용했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 이정도의 경지에 이른 마법사라면 의뢰비가 말도 안 되게 높을 것이다. 테오라드가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 위해 그만한 돈을 지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대체…….’
왜 이 마법사가 테오라드를 도와준 것인가? 추론에 추론을 거듭하던 프레드는 문득 드는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계약을 맺었겠군.’
모종의 거래를 통해 마법사가 테오라드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테오라드는 그 점을 이용하여 마법사를 제 수족처럼 부리고 있는 것이겠고.
‘영혼을 저당 잡혔나?’
마경과 같은 음지에서는 죽음 이후의 무언가를 계약의 매개체로 삼기도 한다고 들었다. 만약 테오라드가 그런 쪽으로 마법사와 계약을 맺었다면 지금의 이 광경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착해빠진 녀석이 뒤로는 이런 음계(阴计)를 꾸미고 있었다니.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한없이 어리고 순수한 녀석인 줄만 알았는데.’
속을 들여다보니 자신보다 더한 뒷세계의 거인이 아니던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프레드 스스로가 정당치 못한 짓을 하고 있는데 괜히 일을 부풀렸다가 백작령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여태 지켜본 바로 테오라드가 에실리를 좋아하고 있는 것은 진심으로 보였다. 테오라드가 뒤에서 무슨 일을 벌이던 여동생에게만 위해를 끼치지 않으면 상관이 없었다.
생각을 마친 프레드가 시체 두 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형제들. 이 시체가 밝혀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우리가 치우자고.”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두 사내가 로브의 소맷단을 거두며 앞으로 걸어나간다. 드러난 손목에는 검은 전갈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좀 나가보겠네. 아직은 피비린내가 익숙하지 않아서.”
쓰게 웃은 프레드가 뒤돌아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테오라드에 대한 의구심을 간직한 채였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적으로 마주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음지의 일에 그 누구보다 깊게 관여되어 있으면서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선의를 내비치는 녀석이라. 혹여나 적이 된다면……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의 제국은 여러 명분을 바탕으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발달한 것이 고문 도구와 기술이었다. 포로는 많았고, 진실을 바로 토해내는 자는 적었으니 이 비윤리적인 행위가 성행한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 지금에 이르러서 고문 도구와 기술은 저속하고 퇴폐적인 구시대의 유물로 변하고 말았다.
마도구의 발달과 마법학의 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육체적인 고통을 주지 않아도 상대방의 진심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를 도와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던 펠가로인 백작가 또한 품위에 어긋난다며 더는 고문 도구를 취급하지 않게 되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과거의 잔재는 여전히 지하에 남아있었다.
“이쪽 방입니다. 꽤 오랫동안 방치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물건은 그대로일 겁니다.”
마르한이 낡은 문고리를 붙잡고 앞으로 몸을 밀었다. 덜컥거리며 열리기를 거부하던 철문이 노면을 긁으며 서서히 열려간다.
“흡!”
마르한이 기합을 주며 힘껏 밀치자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린다. 가볍게 손을 턴 마르한이 앞장서서 걸어가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지하라 그런지 시야가 어둡다. 주변을 둘러보던 내가 손가락을 튕겨 허공에 작은 불꽃을 일으켰다. 마법에 재능이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런 생활 마법쯤이야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썩 좋은 곳은 아니군.”
밝혀진 주변을 둘러보던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천장의 구석에 달라붙은 거미줄이나 바닥에 떨어진 촛농이 아무렇게나 굳어져있는 모습이 생리적으로 불쾌하게 다가왔다.
늘 깔끔하게 유지되어 있는 저택에 비하면 성의 고문실은 비위생적이다 못해 모종의 혐오감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었다니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한숨을 내쉰 내가 벽에 걸린 초에 일일이 불을 붙였다. 그러자 어두웠던 공간이 나름 환하게 바뀌면서 방의 중앙에 놓여있던 고문 기구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
삼각 목마.
문자 그대로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목마의 등에 날을 세운 고문 도구로, 저 등 부분에 고문 대상자를 앉히면 고문 대상자는 자신의 체중에 짓눌려 생식기에 크나큰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건 책에서만 접했는데 실제로 보게 된 것은 처음이다. 이걸 이용하여 누군가를 고문한다는 것 자체가 사도(邪道)나 마찬가지였지만 내게는 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원하던 물건이 맞군. 자네는 올라가서 내 노예를 데려오게.”
내가 태연하게 읊조리자 마르한이 되물었다.
“노예 말씀이십니까?”
“그래. 기사단장의 흉갑에 제멋대로 낙서를 해놨더군. 이참에 체벌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게 할 셈이다.”
“허. 섭정 각하의 노예가 단장님의 흉갑에 낙서를 했답니까?”
“두 번 묻지 말지.”
“아. 예. 알겠습니다.”
뒷목을 긁적인 마르한이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뒤돌아나갔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삼각 목마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궁금하여 가까이서 살펴보던 나는 문득 드는 걱정에 침음을 흘렸다.
‘이거. 너무 위험한데.’
지금 이 방에 놓여있는 삼각 목마는 성고문 도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고문(拷问) 도구다. 상대방의 고통만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피학어린 흉물이란 소리다.
그 증거로 등의 날이 너무 날카롭다. 여기에 멋모르고 앉아버리면 고간의 생식기가 다칠지도 모른다.
아무리 엘프라고는 해도 다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로 엘프는 내게 성고문을 당할 때는 마나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
‘상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면 펜촉에 살갗이 뚫릴 일도 없었을 테니까.’
내 매도에 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방비 상태를 유지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나를 두르지 않았다가 엘프가 피를 본다면…….
‘노려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겠지.’
내가 준비한 상품에 결함이 있다는 걸 눈치 챈 엘프가 무슨 패악을 부릴지 모른다. 솔직히 말해 상상하기도 싫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외투를 벗어서 삼각 목마의 등을 덮었다. 이 정도면 엘프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성욕만을 자극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좀 더 보완할 게 필요한데.’
여기서 끝낸다면 하수다. 매도 업계의 프로가 되어야만 엘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관계로, 나는 방의 구석에 놓인 서랍장으로 걸어간 다음, 서랍을 열어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꺼내들었다.
여러 물건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끝이 날카로운 철제 고리와 튼튼한 밧줄,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가벼운 망치였다.
확신한다. 이거면 고문 방식에 안정성과 특별함을 줄 수 있었다.
나는 서랍장을 삼각 목마가 있는 곳의 바로 옆까지 끌고 간 다음 망치와 철제 고리를 들고 그 위에 올라탔다.
‘어디에 박아야…….’
천장을 잘 살펴보니 세월의 풍파로 벌어진 이음새가 보인다. 나는 그곳에 철제 고리의 끝자락을 가져다 댄 다음 망치로 연달아 올려쳤다.
캉! 캉! 캉!
시끄러운 소리가 몇 번 울리고 나자 철제 고리는 천장에 꽉 박혀버렸다. 고리를 붙잡고 아래로 잡아당겨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만족이다. 망치를 근처에 던져버린 내가 무릎을 굽혀서 밧줄을 주워들었다. 길이는…… 따로 자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적당하다.
몸을 일으킨 내가 고리에 밧줄을 통과시킨 다음 매듭을 짓고 아래로 늘어트렸다.
엘프의 키를 고려했을 때, 삼각 목마에 앉은 다음 팔을 들어 올리면 손목을 묶기 딱 좋은 길이였다.
‘됐다!’
나는 혹시 이쪽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괜한 뿌듯함에 웃음을 흘리다가 뒤늦게 자괴감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헛기침을 한 번 내뱉은 내가 서랍장에서 내려오자, 때마침 근처에서 철그럭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노예를 데려온 마르한이 분명할 테니까.
아흠. 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내가 벽면으로 물러난 다음 삐딱하게 등을 기대었다. 앞머리를 적당히 헝클어버린 다음 시선은 45도 밑으로, 스스로를 냉혈한 사이코패스라 최면하며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연기하였다.
“섭정 각하.”
열린 문 너머로 마르한이 들어온다. 그 옆에는 팔목이 붙잡힌 엘프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훌쩍거리고 있었다.
체벌을 받을 거라는 걸 전해 받은 모양인지 복장은 메이드 정복이 아니라 예의 그 거적대기와 마찬가지인 옷을 입고 있었다.
“노예를 데리고 왔습니다.”
“음.”
“섭정 각하?”
쯧. 부정을 담아 혀를 찬 내가 손을 들어 앞머리를 뒤로 쓸어내렸다. 한쪽 입 꼬리를 부자연스럽게 끌어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미안하다. 이곳에서 내가 고문했던 수많은 작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살려달라는 비명이 내 귓가에 더없이 달콤하게 들려와서 자네의 말이 묻혀버린 모양이군.”
히이익! 두려움을 머금은 것처럼 몸을 떠는 엘프와는 달리, 마르한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저기. 제가 알기로 섭정 각하께서는 오늘 이곳에 처음 방문-”
“오오, 들려온다! 내 죄악을 나무라는 비명들이!”
마르한의 말을 잽싸게 끊은 내가 엘프에게 다가갔다. 섭정 각하께서 갑자기 왜 저러시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마르한의 시선이 심히 거슬렸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 주인닝…….”
붉은 눈동자에 물기를 머금은 엘프가 오들오들 떨면서 나를 올려다본다. 뾰족한 두 귀가 아래로 축 처져있는 모습이 절로 동정심을 자아내게 만들었지만 이건 다 연기일 뿐이었다.
짧게 심호흡을 한 내가 엘프의 귀를 붙잡아 내 쪽으로 홱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내 품에 안긴 엘프가 고통에 신음을 내지른다.
“에끅─!”
“쓰레기 같은 년이. 기사단장에게 다 전해 들었다. 네 비루한 손재주로 단장의 흉갑에 낙서를 했다지?”
“아파아, 아파여엇……!”
“그동안 몇 번을 훈계했음에도 너는 내 말을 들어처먹질 않는구나.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 오늘은 네 년에게 제대로 된 체벌을 겪게 해주겠다.”
엘프의 귀를 놔준 내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오늘 제공할 매도 서비스의 개요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후이잉…….”
눈물을 찔끔 흘리던 엘프는 고개를 들어 내가 준비한 고문 도구를 확인하였다.
삼각 목마와 천장에 매달린 밧줄. 거기다 주변의 분위기도 적당히 어둡고 음산하여 매도를 당하기에는 적격이었다.
엘프 또한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귀를 쫑긋거렸다. 스치듯 지나간 미소 뒤편으로 두려운 표정이 걸린다.
“요,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다행이었다.
“용서로 행동이 교정된다면 나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너는 뭐지? 내 배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실수를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그, 그거언…….”
“마르한. 이 녀석을 목마에 앉히고 천장에 팔을 고정시켜라.”
설마하니 진짜 할 생각인가. 마르한은 내게 그렇게 묻는 것처럼 눈을 끔뻑이더니, 내가 섭정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며 엘프를 끌고 목마로 다가갔다.
“앉아라.”
마르한의 명령에 따라 엘프가 훌쩍거리며 삼각 목마에 앉는다. 그 과정에서 묘한 자극을 받은 모양인지 몸을 움찔 떨며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마르한은 여자의 몸에 흥미가 없다는 듯 관심조차 주지 않으며 엘프의 양 팔을 붙잡았다. 팔을 위로 잡아든 다음 밧줄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손목을 묶은 마르한이 뒤로 물러난다.
덕분에 나는 조금 난감해졌다. 엘프의 팔이 밧줄에 고정되면서 옷 또한 위쪽으로 슬며시 올라갔는데, 워낙 길이가 짧았던 옷인지라 지금 엘프의 음부가 은근슬쩍 드러나고 말았다.
“하으, 아랫도리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어…….”
옅은 분홍빛으로 발색된 음부가 목마의 등 부분에 맞닿아 비벼지고 있는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야하게 다가온다.
거기다 양 팔을 위로 든 상태라 유려한 곡선을 이루는 가슴 또한 생각 이상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다시 봐도 관능적인 몸매다. 아무리 여색과는 담을 쌓아온 나라고 해도 엘프의 속내를 모르고 있었다면 못된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래. 속내를 모르고 있었다면 말이다.
“어떤가. 마음에 드나?”
내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최대한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지금 내 심정은 타들어가는 심지와 같았다. 엘프가 만약 이 매도를 마음에 들지 않아한다면, 나는 꼼짝없이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이고 말 테니까.
─ 최악의 경우 엘프가 테오라드 경을 데리고 대수림으로 가버릴지도.
목숨이 위협받지 않더라도, 무도회에서 에실리가 말해주었던 것처럼 대수림으로 끌려가 평생을 엘프의 장난감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성고문 한 번 한 번이 내게는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과연 이 매도 상품을 엘프가 마음에 들어 할 것인가.
침묵 속에서 반응을 살피고 있으니, 엘프가 별안간 낮게 흐느끼며 어깨를 떨었다.
결과는─
“싫어어어엇……!”
대성공이었다!
생존에 대한 희열에 심장이 두근거릴 지경이다. 빛의 신께 심심한 감사를 전한 내가 엘프의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내가 안배한 물건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확실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나는 옷 아래로 드러난 엘프의 음부를 감상하는 척 하면서 삼각 목마를 눈으로 점검하였다.
삼각 목마의 날카로운 등 부분이 음부에 맞닿아 있었으나 외투로 미리 등 쪽을 덮어놓았기에 엘프가 상처를 입을 위험은 없었다.
거기다 팔을 묶어놓은 밧줄이 두 번째 안정 장치로서 작용한다. 혹여 스스로의 체중에 짓눌린 엘프가 생식기의 고통을 호소하더라도, 밧줄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몸을 일으키면 곧바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렇다고 밧줄이 단순한 안전장치로서의 역할만 수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팔을 강제적으로 들게 만듦으로서 행동을 제한시키고, 가슴을 내게 보여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매도’의 역할도 착실하게 겸하고 있었다.
이른바 일석이조. 안전과 효용성을 모두 챙긴 혜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덤으로 마르한도 있고.’
고문 도구는 처음 사용해보는 것이라 내가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에 대비하여 참관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마르한이다.
청렴하고 굳센 의지를 가진 마르한이 내가 선을 넘지 않도록 제지해줄 것이기에 엘프를 매도함에 있어서 부담감이 없었다.
더구나 이건 엘프에게도 이득이다. 낯선 사람한테 굴욕적인 장면을 보이는 것은 정석적인 매도의 일환이 아니던가.
이것 참.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시나리오다.
‘엘프가 만족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야.’
구시대의 고문도구인 삼각 목마, 매도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여러 안전장치들, 안전요원 겸 매도의 일환이 되어줄 마르한까지.
간단해보이지만 자그마치 세 가지 종류의 기술이 합쳐진 환상의 매도 서비스였다.
자신감을 되찾은 내가 경멸을 담아 엘프를 바라보았다.
“사실 너도 이걸 원하고 있었나보군. 천박한 개보지를 드러낸 채 나를 유혹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아, 아니에요. 저는 이런 걸 원하는 변태가 아니라…….”
반응이 이리도 부정적인 걸 보면 엘프가 꽤나 만족한 것으로 보였다. 좋아. 이대로 매도 수위를 점점 올리는 것으로 엘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면…….
“차라리 예전처럼 저를 덮치셔서 정신을 못 차릴 때까지 범해주세요……. 흐윽, 주인님에게 봉사하는 편이 이런 꼴을 당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
……뭐라는 거야 지금?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는데?
“아니면 하루 종일 주인님의 정액 말고는 다른 걸 먹지 못하게 하셨을 때가 나았어요. 그건 이렇게 수치스럽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니 미친년아! 내가 언제 그딴 걸 시켰냐고!
“섭정 각하.”
마르한의 혐오스런 시선이 내게로 닿는다. 도저히 마르한의 눈을 마주보고 대화할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나는 엘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짧게 대답했다.
“왜 그러지?”
“각하께서는 빛의 신의 신실한 신도라고 들었습니다만.”
“네가 알고 있는 게 맞다.”
“참견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노예의 말을 들어보니 섭정 각하의 신앙에 ‘신실함’은 어디로 도망가고 없는 모양입니다. 빛의 신은 기본적으로 금욕을 주장하지 않습니까.”
“……네가 알고 있는 게 맞다.”
도저히 변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비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엘프가 왜 이런 망할 유언비어를 퍼트리는가. 침음을 흘리면서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였다.
‘마르한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라는 거겠지.’
내가 마르한의 눈치를 본다고 소극적인 매도를 행할까봐, 엘프가 직접 나서서 내 평판을 박살내준 것이다.
개 같은 년이 진짜.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지경이었지만 다 된 음식에 재를 뿌려서야 본말전도다.
크흠.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내가 뒷짐을 지고 엘프에게 다가갔다. 엘프가 겁먹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게 보인다. 묘하게 기대하는 것 같은 눈치다.
나는 엘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악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수치라고 했나? 발정 난 암퇘지에 불과한 주제에 수치를 느낀다고 말하고 있으니 웃기지도 않는군. 새가 날지 못한다고 말한다거나 물고기가 헤엄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게 더 일리가 있을 정도다.”
“새랑 물고기는 말을 못 하는데요 주인님…….”
잠시간의 침묵. 마르한이 헛기침을 빙자한 웃음을 터트리는 게 들려온다.
일부러 나를 열 받게 만들려는 속셈인가? 눈썹을 꿈틀거린 내가 약간의 진심을 담아 비아냥거렸다.
“비유다. 네 미천한 머리로는 언어의 유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그보다 언제부터 네 년이 내 말에 토를 달았나?”
“죄송해여어…….”
“죄송할 건 없다. 지금부터 네 무식함에 대한 벌을 내릴 생각이니.”
내가 손을 들어 삼각 목마를 가리켰다.
“기회를 주마. 지금부터 네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라. 아무리 돼먹지 못한 년이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 하지만-”
“당장.”
내가 엘프의 말을 끊고 가만히 노려보았다. 엘프는 내 눈치를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양 허리를 천천히 앞뒤로 흔들어갔다.
“흐으, 아읏…….”
그때마다 목마의 등에 엘프의 음부가 비벼진다. 본래 일자로 앙 다물고 있던 음부가 양 쪽으로 살며시 벌려진 채 서투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야릇하게 다가왔다.
변태적인 성정의 엘프라고는 해도 본판은 수려한 편이니 남심이 동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 관심은 엘프보다는 삼각 목마를 뒤덮은 외투에 향해있었다.
‘저거 비싼 건데.’
섭정의 역할을 수행하러 백작 성으로 가는 것이니만큼 가지고 있는 외투 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것을 챙겨왔었다.
백작령의 유명한 장인이 내 치수에 맞춰서 한 땀 한 땀 제작해준 값비싼 외투. 그게 지금은 엘프의 성처리 도구의 덮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테오라드 자작님의 외투를 제작한 것은 일생의 영광이라며 잘 사용해달라던 장인분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 외투가 지금 엘프의 음부에 함락당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죄책감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프는 요염하게 허리를 흔들며 거친 숨을 토해내었다.
“주인니임……. 저, 보지가 이상해져서어…… 흐우으…….”
확인해보니 엘프의 말대로였다. 음부에서 묽은 액체들이 조금씩 흘러나와 내 외투를 적시고 있었으니까. 눈으로만 보고 있는데도 꽤나 질척거리는 점액이다.
그게 마치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꺼림칙하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뜨는 것으로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잘도 느끼는구나. 역시 너는 엘프가 아니라 창관의 매춘부로 태어났어야 했다.”
“마, 맞아여어…….”
“하. 맞다고? 대수림의 고귀한 지배자였던 과거는 잊어버린 거냐?”
“그건 아, 아니에여…….”
엘프는 반쯤 입을 벌린 상태로 어눌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내 매도가 마음에 든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슬슬 대미를 장식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라고? 아직도 제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나보군. 그럼 내가 이 참에 제대로 이해시켜주마.”
손을 든 내가 엘프의 옷을 붙잡고 양 쪽으로 살며시 잡아당겼다. 옷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수치심을 더해 줄 생각이었다.
찌이이익─
그런데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찢어지고 말았다. 탱탱한 살집을 이루고 있는 유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뭐야? 대체 뭐로 만들었기에?’
옷이 이렇게 쉽게 찢어질 수도 있던 거였나? 별로 힘을 세게 준 것도 아닌데?
“어, 음.”
당황한 내가 옷을 다시 주섬주섬 올려주었다. 아무리 변태라고는 해도 낯선 사람(마르한) 앞에서 알몸을 보이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가 엘프와 눈이 마주친 내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차갑게 식어있는 두 눈동자가 심히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치 나한테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묻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엘프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 생존의 제 1원칙을 되새긴 내가 망설임 없이 엘프의 옷을 양 쪽으로 찢어버렸다. 그러자 엘프가 깜짝 놀라는 척을 하며 몸을 덜덜 떨었다.
“시, 싫어어엇…….”
역시 이게 정답이었나. 나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피식 웃어보였다.
“네 년에게 옷은 과분하다. 그렇지 않은가?”
“너무해여 주인님…….”
엘프가 우는 소리를 하면서 상체를 살며시 흔들었다. 두 가슴이 엘프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출렁거린다. 그 과정에서 분홍빛을 띠고 있는 유두가 적잖이 발기된 것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만져달라는 신호가 아닌가. 어쩔 수 없는 관계로 내가 손을 들어 엘프의 한 쪽 가슴을 꽉 붙잡았다.
“흐긋!”
“너무한 것은 이런 음란한 몸으로 태어난 네 년이다.”
가슴을 천천히 주무르면서 엘프의 상태를 살피…… 려다가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처음 만져보는 여자의 가슴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비유하자면 물이 가득 담긴 비단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보다 더 말랑하고 부드럽다.
신기한 바람에 마음껏 주무르고 있으니 엘프의 신음소리에 교성이 더해졌다.
“하으으. 그렇게 주무르시면…… 저어, 더 이상 못 참겠어서…….”
못 참다니 뭐를? 위를 올려다보자 엘프가 나사 빠진 얼굴을 한 채로 혓바닥을 개처럼 내밀었다. 거친 호흡이 수증기가 되어 내 안면에 닿을 지경이었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이라면 입 냄새가 전무하다. 음식물 쓰레기를 그렇게 먹어놓고도 싱그러운 숲 향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입을 맞출 수는 없었다! 에실리와도 못 해본 첫 키스를 엘프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천박한 것이.”
쯧. 혀를 찬 내가 엘프와 거리를 벌렸다. 이쯤 했으면 만족해주길 바래서 한 행동이었다.
“하아, 아…….”
그러나 전혀 엘프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괴로운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흥분이 가라앉자 안색이 점차 서늘하게 바뀐다.
시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날 놔주지 않으면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해야 이 방에서 나갈 수 있을까. 머릿속의 주판을 최대한으로 굴리던 내가 번뜩이는 생각에 마르한을 돌아보았다.
“거기. 이쪽으로 오게.”
“저 말입니까?”
“그래.”
마르한이 내게로 성큼 걸어온다. 내가 여태 엘프에게 한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탐탁찮은 표정이었다.
내가 이용하려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마르한의 올곧은 성정을 이용하면 ‘엘프 노예를 괴롭히는 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자의로 그만둔다고 하면 엘프가 화를 내겠지만, 마르한이 이제 그만하시라고 말하는 것으로 매도가 끝난다면 내 책임이 아니게 된다.
마르한에게 희망을 건 내가 최대한 악의어린 얼굴로 말을 건넸다.
“내 노예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은데. 더 심한 모욕을 줄 방법이 있는지 말해보게.”
내 말에 마르한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르한은 푸른 깃발 기사단에서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여기사. 약자를 지켜야 한다는 기사도를 삶의 철칙으로 여기는 자다.
그러니 마르한이여! 눈앞의 폭정에 굴복하지 마라! 아무리 섭정 각하의 노예라고 해도 이정도로 약자를 괴롭히시는 건 옳지 못하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된다!
“섭정 각하.”
명령인가 신념인가. 혼란 속에서 결심을 굳힌 마르한이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저쪽에 쇠구슬이 달린 족쇄가 있던데, 그걸 사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덕분에, 나는 지옥이 연장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면 딱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마르한을 믿었던, 펠가로인 백작가를 받드는 푸른 깃발 기사단의 신념을 높게 샀던 내가 다 초라해질 지경이었다.
물론 마르한의 행동에 결격 사유가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백작 각하의 대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섭정. 백작 각하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마르한이 내 말을 따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왜 한술 더 뜨고 있는 건데……!’
마르한이 내 명령에 너무나도 착실하게 응해주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대충 수긍하는 척 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면 나는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을 터였다. 하나 마르한은 그러지 않았다.
‘더 심한 모욕’을 위해서 ‘쇠구슬이 달린 족쇄’를 이용하라 말해주고 자세한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엘프가 뻔히 듣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눈치 좀 챙기라고, 마르한!’
속으로 절규를 내질렀으나 이 둔감한 기사가 내 표정 너머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퇴로가 막혔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자충수다. 내가 내 꾀에 잡아먹히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는 있었다.
나는 최대한 호흡을 고른 후 다시 한 번 희망을 불태웠다.
“마르한. 자네는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에 입단하여 정식으로 기사가 된 자이지 않은가. 기사가 되기까지의 여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겠군.”
마르한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그럼 한 번 물어보지. 무엇이 너를 기사로 만들었나.”
“약자를 보호하고 마계의 일곱 지옥, 일명 마경으로부터 제국과 펠가로인 가문을 수호하기 위함입니다.”
대답에 망설임이 없다. 그만큼 자신이 기사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신의를 다하여 책무를 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점을 파고들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그럼 조금 안타까운 일이군. 내가 노예를 체벌하는 모습을 옆에서 방관하게 되었으니 말이야.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자네도 ‘공범’이 된 게 아닌가?”
일부러 공범을 강조하였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마르한이 생각을 달리하여 나를 제지할 수 있도록.
밑밥은 다 던져놨으니 이제 마르한이 걸려들기를 기도할 차례다. 마르한은 내 말을 되짚는 것처럼 한동안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확실히. 섭정 각하께서 노예를 체벌하는 모습을 방관하는 것은 제 신념에 어긋나긴 합니다.”
“오호. 그렇다면 이 행위를 중단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러나.”
마르한이 제 심장 앞에 손을 얹었다.
“저는 백작 각하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 백작 각하의 신임을 받아 섭정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테오라드 자작님께도 마찬가지의 충의를 보여야만 합니다. 품고 있는 신념은 강해야 마땅하나 주군의 명령을 앞지를 정도로 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기사도입니다.”
절개가 느껴진다. 절개가 느껴지다 못해 진심어린 마음이 내게 닿았다. 다른 때였다면 이렇게 훌륭한 기사가 다 있느냐며 칭찬세례를 퍼부어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내 안에서 자그맣게 타오르던 희망이 바스러지는 걸 느끼며, 처참한 심정으로 입 꼬리를 말아올렸다.
“오, 올바른 상황 판단이다. 네 말이 맞다. 가서 족쇄를 가져와라.”
“예. 섭정 각하.”
마르한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구석에 놓은 족쇄를 가지러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습관적으로 목의 브로치를 매만졌다.
‘미치겠네.’
상황이 내 의도와는 정 반대로 돌아가고 있어서 그런지 긴장감에 온몸이 따끔거린다. 고문 강도를 높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의도치 않게 성사된 족쇄 플레이에 엘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일단은 돌아보지 말자.’
눈을 마주쳤다가 괜히 책을 잡히면 나만 힘들어진다. 뒷짐을 진 채 기다리고 있으니 마르한이 족쇄를 가져와서 내게 보여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무게가 조금 나가는데…… 아무래도 고문 대상자의 발목에 착용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중을 늘려서 고통을 증감시키는 방식이겠지요.”
척 봐도 무거워 보였다. 마르한의 손은 남자인 나보다도 큰 편이었는데, 쇠구슬이 거의 마르한의 손바닥 만했으니까.
‘이걸 발목에 매단다고?’
농담이 아니고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으니 마르한이 노예를 돌아보았다. 굵직한 두 눈동자에 동정심이 서린다.
“아무리 봐도 이건 저 노예에게 꽤나 힘들 텐데요. 겁에 질린 것처럼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감당할 수 있을지…….”
“……겁에 질려있다고?”
“예. 보시면 아시겠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만 모습으로 딸꾹질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행이다. 이 정도는 엘프에게도 플러스 요인이라는 거겠지. 덕분에 기저의식에 깔려있던 불안감이 싹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몸을 돌려, 마르한의 말대로 눈물을 머금고 있는 엘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노예의 발목에 족쇄를 달아라.”
“예? 하지만…….”
네가 하자며! 이제 와서 발뺌하지 말라고!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된 체벌을 하고 싶어 그런다.”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르한이 엘프에게 다가갔다. 한 쪽 무릎을 꿇고 가녀린 발목에 족쇄를 매달기 시작하자, 엘프가 나를 쳐다보며 애원하였다.
“시, 싫어어……. 주인님, 용서해주세요. 저 정말 죽어버릴지도 몰라여어…….”
아무리 연기라는 걸 알고 있어도 양심의 어느 한 쪽이 적잖이 아려온다. 외양상 가련한 여자가 울면서 애원하는 모습이 보기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의 나는 주방장이 고심해서 내놓은 요리도 한 입 먹고 버릴 정도의 냉혈한 사이코패스. 엘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나는 같잖다는 듯 비죽거렸다.
“앓는 소리 마라. 이정도로 죽지는 않으니까.”
“주인니임…….”
“징징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군. 마르한. 족쇄는 다 채웠나?”
“아, 예. 잠시만 기다리시면…….”
철컥. 족쇄가 발목을 감싸는 소리와 함께 엘프의 한 쪽 다리가 아래로 쏠린다. 쇠구슬의 무게가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히극……!”
당황한 엘프가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꽉 잡아당겼다. 쇠구슬의 무게로부터 저항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마르한이 반대쪽으로 가서 족쇄를 마저 채웠다. 양 쪽 발목에 족쇄가 달리자 몸의 균형이 맞춰진다.
그러나 안도하기엔 이르다. 고르게 무게가 분산된다는 것은 곧, 몸을 아래로 잡아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였으니.
“아파, 아파아앗……!”
목마의 등에 맞닿아 있던 음부가 아래로 눌리기 시작한다. 대음순이 벌어지면서 애액이 보다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그때마다 고통을 느낀 엘프가 이를 악물며 밧줄을 잡아당겨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그 과정에서 유두를 드러낸 가슴이 가볍게 출렁거리고, 음부가 의도치 않게 목마의 등에 비벼지면서 엘프의 고통과 성욕을 동시에 자극시켰다.
“헤윽, 하으으읏……. 보지가 망가져버려여…….”
달뜬 호흡을 내쉬면서 열심히 밧줄을 잡아당긴다. 동시에 하복부에 힘이 들어가면서 벌려진 음부가 좀 더 촘촘하게 목마의 등을 깨물었다. 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음란한 자태였다.
“자모, 잘모해써여……! 흐윽, 이제 용서해주세요 주잉님……! 저어, 오줌이 나올 거 같아서어……!”
불가피한 운동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간 탓에 소변이 마려워진 것일까. 아니면 일부러 참았다가 내 앞에서 누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엘프가 그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
“어쩌라는 거냐. 오줌이 마려우면 누면 될 것을.”
“싫어. 이런 꼴로, 주인님이 보는 앞에서…….”
처량하게 울먹거리던 엘프가 결국 못 참겠다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음부에서 샛노란 액체가 흘러나와 삼각 목마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 위에는 당연하게도 내 외투가 덮어져 있었다.
‘그거 비싼 거라고. 개 같은 년아…….’
마음 같아서는 배변 훈련도 못 받았냐고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매도의 연장선에 놓이고 만다.
치고 빠질 때를 잘 알아야 이 기괴한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음으로, 나는 콧등에 손을 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린내가 여기까지 풍겨져오는 것 같군. 흥이 식었다. 이만 철수하도록 하지.”
마르한이 보기 드물게 화색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족쇄를 풀고…….”
“풀지 마라.”
“예? 하지만 이대로 놔두고 가면 노예가 많이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인 노예라면 그렇겠지. 엘프의 경우에는 이리 방치하고 떠나는 걸 더 기쁘게 받아들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마르한을 노려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두 번 묻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가 으름장을 놓으니 마르한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족을 늘어놓지 않아서 다행이다.
“가지.”
나는 더없이 고고한 자태로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망설이던 마르한 또한 나를 따라서 방을 나온다. 뒤편에서 ‘가지 말아주세요, 주인니임…….’ 같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깔끔하게 무시하였다.
“저기, 섭정 각하.”
복도를 걸어가는 와중에 마르한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하라.”
“외투를 두고 오신 거 같은데 제가 가져옵니까?”
“필요 없다.”
“아, 음. 아끼시는 거라 들었습니다만.”
“아끼는 게 맞다만, 네 덕분에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예?”
네가 족쇄를 들고 오겠다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엘프가 오줌을 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괜한 짜증스러움에 이를 빠득 갈고 있으니 마르한이 뒷목을 긁적이며 옆에 따라붙었다.
“그런데 섭정 각하께서는 은근히 노예를 챙기시나 봅니다. 밧줄하며 외투하며, 전부 섭정 각하께서 준비하신 게 아닙니까? 행동은 조금 거치시지만 역시 노예를 좋아하고 계시는 게…….”
“마르한.”
참을 인 자를 되새긴 내가 최대한 인자한 낯으로 마르한을 돌아보았다.
“한 마디만 더 하면 사형시키겠네.”
*
“음.”
고문실에 혼자 남은 엘프가 열린 문 너머를 응시하였다.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걸 보니 테오라드가 지하를 빠져나간 것으로 보였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나. 입맛을 다신 엘프가 작게 중얼거리자 밧줄이 불타 없어지고 발목에 걸려있던 족쇄가 박살났다.
조심히 삼각 목마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딛자 잔뇨가 고간을 타고 쪼르르 흘러내린다. 엘프는 신경 쓰지 않고 삼각 목마를 뒤덮은 외투를 들어올렸다.
척 봐도 고급스러운 외투의 가슴팍에는 데하름의 자작가의 문양이 금실로 자수되어 있었다.
‘배려인가.’
무슨 생각으로 삼각 목마에 외투를 덮었는지 이해가 간다.
‘더럽네.’
오줌에 범벅된 꼴이 별로 보기 좋지는 않았기에 마법을 이용하여 외투에 묻은 오줌을 말끔하게 청소하였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엘프가 외투를 품에 꼭 껴안은 채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 일종의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에 대한 답이라는 듯 미약한 땀내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으음.’
버리기엔 조금 아까운가. 가지고 있다 보면 언젠가 유용하게 쓸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끝낸 엘프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이 갈라지며 현실과 유리된 균열이 일어났다.
우주가 담긴 것처럼 자색으로 얼룩진 균열이 점차 그 크기를 키워나가며 입을 벌린다. 엘프는 그곳에 테오라드의 외투를 집어던진 다음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균열이 일어났던 공간이 순식간에 원래의 형태를 되찾는다.
볼 일이 끝났으니 이제 슬슬 나가볼까. 엘프는 물기어린 바람을 일으켜 몸을 씻어내다가, 문득 자신을 매도할 때의 테오라드를 떠올렸다.
‘바보 같았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열성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매도에 임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오늘의 장난감은…….’
꽤나 귀여운 면이 있었다.
나흘 후.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백작 각하의 집무실.
나른한 오후를 만끽하며 책을 읽는 내 주변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쇠가 긁히는 소리가 신경을 툭툭 건들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저건 내가 시킨 일이니까.
무시하며 책의 페이지를 몇 번 넘기던 나는 무심결에 소음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각사각─
방의 구석에서, 무릎을 꿇은 채 반질거리는 흉갑에 그림을 양각하는 엘프가 있었다.
주변에는 화지(画纸)가 몇 장 널려있었는데, 그곳에도 수려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엘프가 왜 얌전히 앉아서 화지와 흉갑에 그림이나 그리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푸른 깃발 기사단의 단장인 힐데스가 자신의 흉갑에 새겨진 그림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이곳저곳에 자랑하였고, 그걸 전해들은 부하 기사들과 귀부인들이 내게 조심스레 요청을 해왔기 때문이다.
─ 혹시 저희도 각하의 노예를 통해 그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엘프의 빼어난 그림 실력에 현혹을 당한 것이리라.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굳이 싫다고 말할 필요가 없었음으로 해주겠다고 하였다.
덕분인지 엘프는 일전의 성고문 이후 나흘 동안 계속해서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혹시나 더는 그림을 그리기 싫다며 나를 괴롭히려 들면 어떻게 할까 마음을 졸이긴 했는데, 최근의 내 성고문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즐기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태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계속 저렇게 행동해주면 좋으련만.’
그림에 매몰되어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속내를 숨기며 매도를 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으니 보기 좋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거기다 눈앞의 엘프는 미색이 매우 뛰어나다. 이따금 감탄이 나올 정도로.
햇볕을 머금은 은발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소담하여 아름다우며, 가지런한 속눈썹 아래서 반개한 붉은 눈동자에는 노예답지 않은 기품이 깃들어 있었다.
몸매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미(美)의 정수만을 담아 창조한 생명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마치 여신처럼 고아하였다.
‘이런 여자가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내 성노예를 자처하는 걸까.’
알 수 없으니 더 궁금해진다. 한동안 엘프를 지켜보던 내가 책을 덮고 의자를 돌렸다. 엘프가 내게 호의적인 상태일 때 궁금증을 해결할 속셈이었다.
“너.”
그림을 그리던 엘프가 행동을 멈추고 나를 돌아본다. 의문을 담은 눈동자가 순진하게 깜빡거렸다.
“네 주인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래. 궁금한 게 하나 생겨서 그렇다.”
“궁금하신 거라면?”
“네 과거에 대해서 확인하고픈 게 생겼다는 소리다.”
“엣…….”
엘프가 어깨를 움찔 떨더니 별안간 얼굴을 붉힌다.
“어쩔 수 없는 건가요…….”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섬주섬 앞치마를 벗기 시작했다.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황당하게 바라보니 엘프가 쑥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주인님께서 제가 처녀인지 아닌지 궁금하시다니까 알려드릴 수밖에 없는 걸요……. 이런 곳에서 성교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주인님이라면 저는 개처럼 박힐 준비가 되어 있어여…….”
아니, 잠깐만.
과거가 궁금하다는 질문이 대체 왜 처녀성 확인으로 이어지는 거지? 하도 어이가 없는 바람에 인지부조화가 온다. 멍하니 있으니 엘프가 팬티의 양 끝을 붙잡고 아래로 내리기에 내가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도, 돌았느냐!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백작 각하의 집무실이란 말이다!”
“히잉. 그래서 여기서 하자는 말씀이잖아요. 하면 안 될 곳에서 성교를 함으로서 배덕감을 느끼시려고…….”
“내가! 대체! 언제 하자고 말했다는 소리냐! 이 배은망덕한……!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기겁하며 소리치자 엘프가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다.
“주, 주인님? 제 보지를 사용해보시려고 말을 건 게 아니었나요?”
“내가 무슨 성욕에 미친놈인줄 아느냐!”
“히익! 죄, 죄송해여엇……!”
엘프가 급히 무릎을 꿇고 부복하였다. 엉덩이를 위로 치켜들고 엎드렸기 때문에 메이드 정복의 치맛자락이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엉덩이 골이 훤히 보인다. 더해 팬티를 올려 입지도 않아서 허벅지에는 팬티가 대놓고 걸려있었다.
혹여나 다른 사람이 집무실에 들어왔다가 이 꼴을 본다면 낭패나 다름없다. 미간을 찌푸린 내가 짜증스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됐으니까 일어나서 옷을 갖춰 입어라.”
“네, 네에…….”
내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엘프가 팬티를 올려 입고 앞치마를 다시 둘렀다. 그제야 안심한 내가 본래의 취지로 돌아가서 말문을 열었다.
“천박한 년아. 멋대로 내 질문을 곡해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너, 노예가 되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었지?”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위험한 질문이었으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지금의 엘프에게는 괜찮을 것이다. 이 질문으로 인해 엘프의 정체에 대한 자그마한 힌트라도 얻을 수 있으면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노예가 되기 전에는…….”
엘프가 내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잘 모르겠어요. 기억이 나질 않아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인가.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하니 조금 오기가 생긴다. 내가 혀를 쯧 차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럼 이름이라도 말해보아라.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겠지?”
“죄송해요 주인님. 이름도 기억나지 않아요.”
이름조차 알려주기 싫다 이건가. 가명이라도 말해주면 어떻게든 추측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정보를 수집하려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으로 물어보면 엘프의 의심을 산다. 나는 대충 손을 휘젓는 것으로 더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네 년이 덜떨어졌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으니 놀라울 것도 없다. 됐으니까 완성한 그림이나 가져와라. 귀부인들에게 전해주기 전에 내가 미리 봐야겠으니.”
“아, 알겠어여…….”
고개를 끄덕인 엘프가 바닥에 놓인 화지들을 모아 내게 내밀었다. 마뜩찮은 얼굴로 화지를 받은 내가 엘프가 그린 그림들을 살폈다.
‘……잘 그리네. 확실히.’
화지를 가로지른 선 하나하나에 모종의 힘이 서려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무에는 생기가 가득하고 피어오르기 직전의 꽃에서는 생동감이 전해질 정도였다.
그림만 보고 있는데도 내가 숲 안에 들어서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확실히 하루 이틀 그려본 솜씨가 아니다.
감탄이 나오려는 입을 애써 무겁게 만든 내가 다른 그림들도 살펴보았다. 대부분 숲을 주제로 한 동식물들이 유려한 화풍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의도한 것인지 무의식의 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그림에서 사슴이 나온다. 뿔을 올곧게 세운 사슴이 역동적으로 달리고 있는 모습들이 이곳저곳에 묘사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자유롭게 숲을 거니는 사슴이라고 생각했으나 계속해서 보고 있으니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사슴들은 마치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숲에 염증을 느낀 건가? 아니면 뒤에서 사냥꾼이 쫓아오는 걸지도 모른다.
“주인님?”
엘프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어진다. 내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버러지 같은 노예 치고는 꽤나 잘 그렸구나. 이 정도면 귀부인들과 기사들이 만족…….”
엘프의 두 눈이 미묘하게 좁혀진다. 설마 그림을 잘 그렸다는 칭찬도 고깝게 듣는 건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킨 내가 화지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할 리가 없지 않느냐! 병신 같은 년아!”
휘날리는 화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꽃잎처럼 나풀거린다. 그게 마음에 든 모양인지 엘프는 울먹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죄에, 죄송해여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암퇘지라서 죄송해여…….”
“쯧. 죄송한 걸 알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라.”
“처, 처음부터는…….”
박복한 명령인 걸 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매도의 일환. 나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턱을 들었다.
“칭얼거리지 마라. 밤을 꼬박 새우면 될 것이니.”
“너무해여 주인님…….”
훌쩍거린 엘프가 바닥에 떨어진 화지를 주섬주섬 주워들고는 방의 구석으로 걸어가서 주저앉았다.
“흐이잉…….”
딸꾹질까지 해가며 눈물을 삼키는 모습이 애처로웠지만 연기에 불과할 뿐이다. 마음을 굳게 먹은 내가 시선을 돌리자, 때마침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며 옷을 잘 차려입은 사용인이 들어온다. 사용인은 내게 예법을 취해 인사를 건넨 다음에 정중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테오라드 자작님. 백작 각하께서 복귀하셨음을 알리기 위해 이리 실례를 범했습니다.”
“……백작 각하께서?”
듣기로는 내일 아침에 오신다고 들었는데. 당황한 내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바로 가도록 하지.”
*
백작 각하께서 성의 제 3 응접실에 기다리고 있다고 하여 그리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리 크지 않은 방의 소파에 앉아있는 백작 각하가 보였다.
문을 등지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나는 저 사람이 백작 각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흐음, 흠.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내가 최대한 공손한 걸음걸이로 다가가 백작 각하의 반대편에 섰다.
“아무런 탈 없이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백작 각하. 미리 말씀을 주셨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대답은 없었다. 백작 각하는 손에 든 책을 읽는 것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어색하게 서 있으니 백작 각하께서 작게 읊조렸다.
“앉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내가 자리에 착석하였다. 그러며 백작 각하의 외양을 살폈다.
에실리를 닮은 금발을 뒤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모습에서 정갈함이 엿보인다. 각 잡힌 궁중 예복에는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았으며, 날카로운 두 눈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처럼 책의 탐독에 열중이었다.
나이가 쉰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잘한 눈주름을 제외하면 노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액면 상 서른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정정한 모습이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품위가 느껴지는 백작 각하의 이름은 레오베르크 펠가로인. 정계(政界)에서는 물론이고 재계(财界)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는 대영주였다.
또한 제국을 지탱시키는 다섯 기둥 중 한 명이라 불리고 있으며,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도 백작 각하에게는 쓴 소리를 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고 가진 권력을 바탕으로 남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으신다.
항상 중경외폐(中扃外闭)하며 척당불기(倜傥不羁)하시기에 청렴하며 올곧다. 그 점이 참으로 멋있었다.
백작 각하는 내가 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는 분으로, 훗날에 백작 각하와 같이 뛰어난 사람이 되고자 매일 마음먹을 정도였다.
‘헌데 백작 각하.’
대체 언제까지 책을 읽고 계실 겁니까.
한참을 기다려 봐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시기에 말을 붙이기가 망설여진다. 어쩔 수 없는 관계로 가만히 침묵하고 있자, 해가 저물고 나서야 백작 각하께서 책을 덮었다.
“나쁘지 않군.”
짧게 감상평을 내뱉은 백작 각하가 나를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가 서슬 퍼렇게 좁혀진다.
“그러나 네 얼굴을 보니 짜증이 솟구치는구나.”
가슴 아픈 말이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대충 예상이 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오랜 벗이자 제국의 중부를 지배하는 펠가로인의 당주인 백작 각하께서는…….
“네놈이 날이 갈수록 잘생겨지니 내 외모가 형편없게 느껴지지 않느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것에 조금 서툰 분이시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설익은 미소를 지었다. 백작 각하의 의중은 진즉에 파악하였지만, 괜히 아는 체를 하는 것은 무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백작 각하는 그런 나를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목석같은 눈빛을 한 채 아주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나는 너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를 입히려고 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알겠는가.”
혹여 내가 의도와는 다르게 상처를 입었을까봐 말을 덧붙이신다. 어투와 몸짓은 정갈하고 차가우나 그 속에 담긴 뜻은 혜화(惠化)를 행하는 선교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온정을 따스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대답하였다.
“물론입니다. 백작 각하.”
“흥. 알았으면 됐다.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 그런지 나쁘진 않구나.”
“저 또한 백작 각하의 존안을 뵈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입바른 말을 하는구나. 그런다고 내가 좋아할 성 싶으냐?”
백작 각하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꿈틀거린다. 미소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기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참으로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내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자, 어흠! 크게 헛기침을 내뱉은 백작 각하께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잡담은 잠시 접어두도록 하지. 성에 도착한 직후에 힐데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네가 강도 녀석들을 모두 잡아들었다지?”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엘프가 한 짓이지만.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기에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섭정으로서의 역할을 제법 잘 해낸 모양이군. 형편없는 놈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다행이다. 헌데 무도회에서의 일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무도회라면…….”
“내 딸아이에게 뺨을 맞은 것 말이다.”
“아.”
잠시 잊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나고 말았다. 이것도 말하자면 엘프 때문이었지만 속내를 털어낼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내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문 뒤편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뭔가 싶어서 귀를 기울여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아가씨! 들어가시면 안 돼요! 지금 테오라드 자작님하고 백작 각하께서 이야기를 하시는 중이시라니까요?
─ 제가 바보에요? 그 정도는 잘 알아요. 그냥 멀리서 보기만 하려는 거예요. 그건 괜찮죠?
─ 하아. 정말…….
투닥거림 끝에 에실리가 열린 문 옆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생선을 강탈하러 온 고양이처럼 방 안을 살펴보던 에실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우물쭈물하던 에실리가 별안간 배시시 웃으며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다. 반사적으로 마주 인사를 건네려던 나는 눈앞에 백작 각하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네가 내 딸아이의 입술을 훔치려고 했다더군. 아무리 네가 내 딸아이와 약혼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교양이 없는 짓이다.”
“그, 그렇습니다.”
백작 각하에게 대답하면서도 내 시선은 자꾸만 에실리가 있는 쪽으로 가고 말았다.
내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에실리는 아예 문 너머로 걸어 나오더니 머리 양옆에 주먹을 대고 검지를 세웠다. 그러며 입술을 삐쭉 내밀고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뭘 표현하려는지 알겠다. 저건 화난 백작 각하다. 백작 각하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 것으로 내 긴장을 덜어주려는 속셈으로 보였다.
문제는 에실리가 저러고 있으니 웃음이 터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웃어서는 안 된다. 내가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으니 백작 각하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물론 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교제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으니 애가 탔겠지. 그러나 여인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입을 맞추려는 것은 신사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알겠는가.”
“예.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겠다니 이번 한 번만 너그러이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강도단을 잡은 공로에 대한 보상을 논하도록 하지.”
“예? 보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연한 일을 하였기에 보상을 주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지 못하는 놈들이 지천에 널린 게 요즘 세상이니. 그런 점에서 신상필벌(信赏必罚)을 행하려는 것이니 부담을 갖지 마라.”
백작 각하께서 고상하게 손뼉을 두 번 두드렸다.
“들어와라.”
동시에 문 너머에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 아가씨. 이건 제가…….
─ 괜찮아요. 제가 하게 해주세요. 네?
─ 안 된다고 하시면 또 떼쓰실 거죠?
─ 어허. 떼쓰는 게 아니라 정당한 의견 표명이라고요?
─ 에휴. 알겠어요.
한숨을 내쉰 사용인이 에실리에게 작은 상자를 건네준다. 에실리는 상자를 받아든 다음 이쪽으로 걸어왔다.
내게 눈인사를 건넨 에실리가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놓자, 이상함을 느낀 백작 각하께서 고개를 틀었다.
“에실리?”
점잖은 두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왜 방에 있지 않고 이리 나와 있는 것이냐?”
“아버지를 빨리 뵙고 싶어서요. 겸사겸사 테오라드 경에게 사과도 드리고 싶었고요. 일전에는 제가 너무 무례했어요.”
일견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참석이었지만 백작 각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 모두가 보는 무도회에서 약혼자의 뺨을 때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빨리 깨달아주어 다행이구나.”
“어리지만 명석하잖아요. 아버지의 딸이니까요.”
애교어린 에실리의 말에 백작 각하의 날카로운 인상이 푸근하게 내려앉는다. 세간에서 딸 바보 소리를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작게 웃음을 흘린 백작 각하가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내가 긴장을 유지하며 허리를 곧추세우니 백작 각하께서 느긋한 손짓으로 내 쪽으로 상자를 밀었다.
“열어보거라. 나 대신 백작령을 맡아준 것에 대해 소정의 선물을 준비했으니.”
“예. 백작 각하.”
대답하며 상자를 살폈다. 화려하지만 너무 과하지는 않게 장식된 상자의 윗면에는 펠가로인 백작가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했던 내가 상자를 열자, 온갖 보석들과 금화가 한 가득 들어있었다. 반사적으로 놀란 내가 헛숨을 들이켰다.
“각하? 고작 강도 몇 명을 잡아넣은 보상이라기엔 너무 후합니다.”
그러자 백작 각하께서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내 호의를 무시할 셈이냐?”
“하지만, 이건…….”
“받아두거라. 다른 말은 받지 않겠다.”
나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각하께서 보상을 줄 명분을 만들어서 내게 금은보화를 안겨준다는 느낌이 강하였지만,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상자를 받아들자 백작 각하는 끌끌 웃으면서 손을 휘저었다.
“피곤하군. 잠시 황실에서의 일을 복기해야겠으니 둘 다 나가거라.”
왜인지 저 말이 ‘둘만의 시간을 가져라’라는 것으로 들려온다. 에실리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갈까요? 테오라드 경.”
그에 나도 미소로 화답하였다.
“그러지.”
*
응접실에서 빠져나온 나와 에실리는 성의 안뜰을 가로질렀다.
봉오리 진 꽃들이 내일을 기약하며 잠들어 있는 공간에서, 어색한 마음이 든 나는 괜히 목의 브로치를 매만지며 밤하늘을 응시할 뿐이었다.
무어라 첫 운을 떼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에실리도 마찬가지의 감정인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안뜰의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에실리가 작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죄송해요.”
갑작스럽다. 목을 큼큼 가다듬은 내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뭐가 말이냐.”
“제가 테오라드 경을 나쁜 놈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잖아요. 뺨을 때리고, 나흘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으니. 사교계에서는 아마도 ‘에실리 영애가 화가 나서 테오라드 경을 만나주지 않았다’같은 소리가 돌고 있을 거예요.”
“우스운 소리다. 그건 모두 나를 위해서이지 않느냐.”
“그래도요.”
“걱정하지 마라. 성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둘이서 만나 안뜰을 산책하고 있지 않느냐. 이 모습을 본 사용인들이 제멋대로 소문을 퍼트릴 것이니.”
애초에 방이 아닌 안뜰에서 시간을 보내자고 한 것이 에실리였다. 알게 모르게 이쪽을 지켜보는 사용인들의 입을 통해 내 명예가 회복되기를 원했기에.
“맞아요. 화해를 했다고 소문이 퍼지겠지요. 그래도 역시, 조금은 화가 나는걸요.”
그러나 에실리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귀엽게 투덜거렸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화해라니요. 생각하면 할수록 테오라드 경을 괴롭히는 엘프가 미워져요.”
“나도 마찬가지다. 너와의 관계에 흠집을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점점 힘들어질 것 같구나.”
“콕 집어서 말하자면요?”
내가 부담스러움에 뺨을 긁적였다.
“그게…… 성적인 부분에서 흠집이 날까 걱정하고 있다.”
“흐음. 그거 궁금한데요? 어떤 부분에서 흠집이 날까 걱정하셨을까요?”
이거 진짜 말해도 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망설이는데, 에실리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져서 말을 물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내가 죄를 고백하듯 읊조렸다.
“내 처음을…… 에실리 네가 아닌 엘프에게 빼앗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네? 처음?”
에실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걸음을 멈춘다. 덕분에 나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에실리는 한동안 무어라 말을 못하고 있다가, 마음을 정리하곤 겨우내 입을 달싹였다.
“처음이라고요? 혹시 테오라드 경은 한 번도 여자랑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어요?”
당연한 거 아닌가. 약혼한 이후부터 나는 너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렇다만. 너도 그렇지 않은가?”
“저는 여자의 몸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테오라드 경은…… 그게, 가문의 장남이잖아요? 귀족 가문의 태반이 성교육을 한다면서, 그으…….”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다만 데하름 가문은 그런 식으로 성인식을 치루지 않는다. 빛의 신께 맹세하건데 나는 여자와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다.”
에실리의 얼굴이 화악 붉어진다. 머리칼이 위로 붕 떠오르고 양 손이 부자연스럽게 꼼지락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에실리가 억울한 것처럼 눈물을 글썽였다.
“흐잉.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제가 어떻게든, 막, 그냥…… 엘프에게 당하기 전에, 단 둘이서, 그러니까…….”
문장이 되지 못한 단락들이 연거푸 늘어진다. 이해가 안 됐던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려는 말이 뭔가?”
“말은 아닌데…….”
어린애처럼 굴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여기서 하라. 내일이면 돌아가 봐야 하니 시간이 없지 않은가.”
“마, 말도 안 돼요! 그걸 여기서 어떻게 해요?”
“하지 말던가.”
장난을 칠 요량으로 한 발 뒷걸음치니, 에실리가 두 발 가까이 다가왔다.
왜 이러지?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서 에실리가 내 허리를 가볍게 붙잡는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이성을 반쯤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 조금만 실례할게요.”
“무슨 실례를-”
에실리가 까치발을 들어 올려 내 입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쪽. 당황스러운 바람에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심장이 크게 맥동한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고가 정지되고 모든 걱정들이 덧없이 느껴졌다.
그리 5분 같은 5초가 지나고 나서야 에실리가 입술을 떼내며 수줍게 웃었다.
“저는 처음이에요. 테오라드 경도 처음인가요?”
“……처음이다.”
“다행이네요. 이것까지 엘프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어요.”
호흡이 조금 거칠다. 그러나 이성을 되찾은 것인지, 에실리는 부끄러움 속에서 내 손을 붙잡았다.
“테오라드 경. 주제넘은 말이지만 저랑 한 가지만 약속해주시겠어요?”
“약속하마.”
에실리가 고개를 들었다. 청금석을 닮은 눈동자에 밤하늘의 별빛과 나의 얼굴이 동시에 담긴다.
“몸의 처음은 엘프에게 넘겨주더라도.”
그물처럼 잡아당겨진 손이 에실리의 윗가슴에 얹어진다. 에실리는 내 손목을 꼭 붙잡으며 조금은 슬프게 입술을 달싹였다.
“부디 마음의 처음은 저를 위해 남겨주세요.”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에실리의 화법은, 나의 이기심을 배려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거역할 수 없는 이기임을 잘 알기에…… 나도 에실리도 어쩔 수 없이 이 연극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겠어요?”
청초한 물망초를 닮은 미소가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나는 에실리의 뒷머리를 붙잡아, 내 품으로 끌어안으면서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내게 있어, 처음은 언제나 너였다.”
앞으로도 너일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을 되는대로 뇌까리며, 위로하듯 에실리의 등을 토닥거렸다.
긴 포옹 끝에, 에실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밤늦게까지 나눈 나는 개운한 기분으로 방에 돌아와 잠에 빠져들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에는 마음이 한결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혼자만 앓고 있던 비밀을 다른 이와 공유하고 있다는 게 이리도 큰 위안이 될 줄이야.
거기다 안뜰에서 에실리가 내게 건넨 고백 아닌 고백이 심장을 계속해서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어스러지는 달빛 아래에서 물기어린 말을 내뱉는 에실리는 평소보다 몇 배는 아름다웠다.
─ 부디 마음의 처음은 저를 위해 남겨주세요.
지금도 에실리가 읊조린 말이 뇌리에 선명하게 재생이 될 정도였다. 애처로우면서도 귀엽고, 자애로우면서도 매혹적인 장면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다시 생각해봐도 에실리는 내게 과분한 여자다. 어째서 나 같은 남자를 좋아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미안하면서도 고마워서, 무심코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돌아가기 싫을 지경이네.’
마음 같아서는 성에 더 체류하면서 에실리와 대화를 더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성 안을 돌아다니는 엘프를 피해서 지속적으로 밀담을 가진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기도 하고, 데하름 가문의 당주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저택의 일이 꼬이고 말 테니까.
시종장인 하비드와 가신 기사인 베이넌이 가문을 잘 지켜주고 있겠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른 아침부터 짐을 싼 후에 백작 각하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성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였다.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똑똑 두드리자, 내가 예의상 말을 건네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지.”
“예.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집무 책상 위에 앉아있는 백작 각하가 보였다.
외눈 안경을 낀 채 서신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에서 격이 다른 품격이 느껴진다.
백작 각하는 유려한 필체로 글을 써내려가며 읊조리듯 조용하게 말했다.
“떠나려는 모양이군. 일정이 이른 것 같은데 하루 이틀 더 묵고 가지 그러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택을 오래 비울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것에서 고지식한 면은 제 아비를 빼다 박았군.”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타오르는 초 위에 거치된 멜팅 스푼에서 미약한 연기가 올라온다. 백작 각하는 서신을 계속 써내려가며 말을 덧붙였다.
“칭찬이다. 고깝게 듣지 말도록.”
“당연합니다. 백작 각하.”
“그래. 그런데 단 둘이 있을 때는 명칭에 격의를 두지 않아도 된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리 눈치가 없어서 내 딸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으려고 그러나. 장인어른이라 불러도 된다는 말이다.”
백작 각하의 호의에 마음 한 편이 푸근해지는 느낌이다. 듣기에 달가운 말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식을 올리고 난 뒤에 그리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은 시기상조이니 조금은 격의를 가지려고 합니다.”
“쯧. 다시 말하지만 너는 쓸데없는 것에서 고지식하다. 하여간 요즘 젊은이답지 않아.”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칭찬이 아니다. 훈계로 받아들여라.”
장인어른이라 불러주지 않아서 삐지신 건가. 내가 눈치를 보고 있자 백작 각하께서 집필을 끝마치시고 서신을 반으로 접었다. 마치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게 접힌다.
“테오라드. 이건 조금 나중에 알리려 하였다만 네가 급히 떠난다니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도록 하겠다.”
서신을 한 번 더 접은 백작 각하께서 편지 봉투에 종이를 넣고 끝자락을 툭툭 두드렸다.
“황실에서 네게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있더구나.”
황실에서? 나한테? 급작스러운 이야기에 대답을 못하고 있자, 백작 각하께서 여유로운 몸짓으로 멜팅 스푼을 붙잡았다.
“지금쯤 황실에서 보낸 편지가 데하름 가문에 도착했을 터이니 저택에 가면 네게 관심을 가진 분들이 누구인지 알 것이다. 황실과 연을 틀 좋은 기회이니 놓치지 말거라.”
“정말입니까? 대체 어떤 분들이시기에……. 아니, 그보다 그런 분들이 제게 왜 관심을 가지신단 말입니까?”
“의문은 편지를 받아든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테오라드. 나는 너를 높게 평가한다. 평생을 부백작으로 살 것이 아니라면 이번 기회에 동아줄을 잡거라.”
백작 각하께서는 너그러운 어투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마법 연구에 대한 황실 정기 보고 때문인가? 그렇다기엔 나는 마법적 능력이 특출 난 것도 아니며 논리에 타고난 학자도 아니다.
황실에서 데하름 가문의 위상을 높게 샀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데하름 가문은 백작령에서야 인지도가 좀 있는 편이지 황실에서까지 신경 쓸 정도의 가문은 아니니까.
‘이건 아무래도…….’
백작 각하께서 일부러 황실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과 접촉하여 나를 잘 봐달라고 말을 전한 게 틀림없다.
은혜로운 처사이기는 하지만 가문의 일도 벅찬 가운데 황실의 관심까지 받게 된 것이 과연 좋은 일일지는 잘 모를 일이다.
그래도 백작 각하께서 힘써주신 건 사실이니만큼 나는 예를 담아서 고개를 숙였다.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백작 각하.”
“음?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황실에서 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순전히 네 능력이 뛰어나서 윗분들의 관심을 받은 것이니 나에 대한 감사는 접어두거라.”
백작 각하의 새끼손가락이 미묘하게 꿈틀거린다. 각하께서 무의식중에 거짓말을 할 때 드러나는 습관이었다.
‘이야기 꺼내신 게 맞지 않습니까.’
속이 뻔히 들여다보였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백작 각하께서 밝히고 싶지 않아하는데 기어이 아는 체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이곳에 오기 전에 내가 전하고자 했던 말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백작 각하.”
“말하라.”
“주제넘은 질문입니다만, 제가 사로잡은 죄인들 중 ‘머넌’이라는 죄인의 처벌 권한을 제게 양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작 각하께서 멜팅 스푼을 들어 편지 봉투의 중앙에 실링 왁스를 내리부었다. 이후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편지를 봉한다.
“이유가 뭔가. 욕망인지 원망인지 공익인지 명예인지 말하라.”
“욕망도 원망도 공익도 명예도 아닙니다. 다만 그 죄수에게서 남편을 잃은 부녀자를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백작 각하께서 반지를 떼고 손을 털었다.
“이유는 연민이군. 그중에서도 선의를 베풀고자 함인가. 생각이 어리고 명석하지도 않다.”
“각하.”
“그러나 이 어두운 세상 어딘가에는 있어야 할 소금이며 빛이다. 백작령에 너와 같은 인재가 있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지. 허락하마.”
연거푸 베풀어지는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감복하였다.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별 게 다 감사하구나. 인생을 그리 살면 퍽이나 피곤하겠어.”
끌끌 웃은 백작 각하가 서랍을 열어 주먹만 한 상자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이만하면 됐으니 이걸 가지고 돌아가라. 나는 집무에 집중할 터이니.”
“그건……?”
“약혼반지다. 내 너희들의 연애에 관련하지 않으려 했다만, 교제를 한지 그리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지 하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더구나.”
“송구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한 뒤에 선물하려고 하였기에.”
“그래. 그래서 마음은 잘 알았고?”
“예.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백작 각하의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가 걸렸다. 말하자면 흐뭇함에 가까울 것이다.
“다행이군. 그만하면 내 딸아이도 네 성의를 싫어하지 않겠구나.”
“제 성의라니요? 이건 어디까지나 백작 각하께서 준비해주신…….”
“이 녀석아. 약혼반지를 선물하면서 내 이름을 들먹일 생각이냐? 정직한 것도 정도껏이지. 같잖은 소리 말고 네가 산 것이라 둘러대거라.”
“허나…….”
“그만. 한 마디만 더 하면 나와의 관계를 파탄 내겠다는 뜻으로 알아듣겠다.”
백작 각하의 으름장에 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쩔 수 없는 관계로, 나는 말없이 반지 케이스를 받아들었다. 그런 내 행동을 지켜보는 백작 각하의 눈동자가 어쩐지 따스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