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를 저택에 들인 것은 분명 나의 업보다.
그게 과연 악(恶)이며 과보(果报)의 죄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 탓을 할 생각은 없다.
어찌되었든 엘프 노예를 사겠다고 결정한 것은 당시의 내 비대한 정욕과 한 줌의 이성으로 결정된 것이었으니.
아무리 그래도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엘프로 인해 피해를 입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나로 말미암아 발생한 모든 문제에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귀족으로서의 의무이자 책무였으니까.
“데하름 자작가의 가주이신 테오라드 경께서 입장하십니다!”
내 위세를 살려주려는 사용인이 목청을 높이며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긴장을 유지하며 정면을 응시하던 나는 문 너머의 풍경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별 일 없었구나.’
입 밖으로 내뱉기도 민망할 정도의 최악을 상정하던 나로서는 엘프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는 에실리의 모습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오늘도 아름답구나, 너는.’
치렁하게 늘어진 금발이 햇볕을 받아 금싸라기처럼 빛나고, 청금석을 닮은 벽안은 어느 맑은 날의 바다를 담은 것처럼 아름답다.
다른 모든 여자가 해안가의 사토에 불과하다면 에실리 너는 찬연하게 빛나는 보석이리라.
성격까지 하해와 같이 은혜롭고 넓으니 어찌 너를 좋아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나가다가, 하비드가 따라 들어오려 하기에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알겠습니다. 그럼 사용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뜻을 알아들은 하비드가 뒷걸음으로 물러나곤 응접실의 문을 닫는다.
엘프까지 쫓아내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지만, 노예는 기본적으로 물건 취급이니 인명에 포함하지 않았다고 나무랄 수는 없었다.
“아. 테오라드 경!”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에실리가 밝게 웃으며 손을 들어올린다. 귀족의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으나, 지금은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데 무얼.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에실리 영애.”
에실리가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는다. 이주 전에도 보았는데 그리 기쁠까.
나는 기품을 유지하며 의자를 꺼내 에실리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러자 에실리의 옆에 서있던 엘프(시종장이 챙겨줬는지 메이드 정복을 입고 있었다)의 시선이 자연히 나로 향한다.
그 시선의 애매모호함을 한 마디로 정립하자면 ‘불쾌’에 가까웠다.
‘망할.’
알겠으니 조금만 참아라 엘프. 에실리를 빨리 돌려보낸 다음에 네가 원하는 매도 플레이를 해줄 테니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내가 없는 동안 심심하지 않았나?”
내가 운을 떼자 에실리가 엘프를 한 번 흘겨보고는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전혀요. 동화 속에서나 보던 엘프를 볼 수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아. 영애는 엘프를 처음 보는가?”
“그럼요. 엘프는 기본적으로 개체수가 모든 종족을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다 대수림의 지배자 계층이잖아요? 보통은 대수림의 깊숙한 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으려드니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죠.”
하긴. 노예 사냥꾼들이 우연찮게 길 잃은 엘프를 포획해서 숲 밖으로 데리고나오는 경우가 아니면 볼 일이 없긴 하였다. 내 저택에 있는 엘프는 일부러 잡혀온 것이지만.
“그런데 노예로 잡혀온 것을 보면 상당히 어린 나이겠죠? 엘프는 백 살만 넘어도 노예 사냥꾼 정도는 어린애 상대하듯이 가지고 놀 수 있을 테니까요.”
“아, 음.”
에실리도 알고 있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에실리가 박학다식하다고 해야 할지 내가 견문이 짧다고 해야 할지…….
아무래도 둘 다인 거 같았다. 나는 스스로의 무지함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이는 그… 스물다섯이라고 보면 되네.”
“스물다섯이요? 어머나. 저보다 어린 줄 알고 하대했었는데 실상은 세 살 언니였네요. 아아. 꽃다운 나이에 노예가 되다니 이 얼마나 가련한 인생인가요.”
에실리가 측은한 시선으로 엘프를 돌아본다. 덕분에 엘프의 이마에 격자로 힘줄이 돋아났다.
무표정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엘프의 주변으로 불쾌한 오오라가 풍겨지는 게 느껴졌다.
에실리가 이 이상 엘프에 관심을 가졌다가는 죽는다……! 상황이 위험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직감한 내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그, 그보다 영애는 내 저택에 웬 일로 온 건가. 미리 연락도 주지 않고 말이야.”
“뭐예요. 제가 와서 불만이신 거예요?”
에실리가 뚱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린다. 그 모습이 귀여운 바람에 괜스레 입 꼬리가 올라갔다.
“설마. 단지 특별한 용무가 있을까 싶어 확인 차 물어본 것이네.”
“용무라면…… 그러네요. 테오라드 경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지만 전언(传言)을 위해 온 것도 있어요.”
“전언이라 하면?”
“아버지께서 조만간 황도로 올라가시나 봐요. 황제 폐하께서 각지에 퍼져있는 군벌 세력들에게 소집령을 내리셔서. 지긋지긋하죠. 그따위 북벌이니 마계 정벌을 대체 몇 번이나 들먹이는지. 하지도 않을 거면서.”
“에실리 영애. 마음은 이해하지만 말을 좀 가려하는 게…….”
“말을 가려 할 거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요. 테오라드 경도 황제 폐하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괜히 영주들 기강 다지려고 쇼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말에 거침이 없다. 내가 아니라 다른 귀족이었다면 황제 폐하를 욕보였다면서 노발대발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언행이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에실리는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거겠지. 나쁘지는 않았다.
“하여튼 그런 이유로 조만간 아버지께서 테오라드 경에게 백작령을 맡기실 거예요.”
“백작 각하께서 내게 섭정을?”
“네. 가주가 되신지 얼마 안 되셨다고는 하나 테오라드 경은 엄연히 데하름 자작가의 주인이시자 부백작이시니까요. 이번 기회에 아버지께서 테오라드 경의 통치 능력을 시험하려는 것 같기도 해요.”
이건 좀 의외인데. 언젠가 백작 대리의 직함으로 백작령을 통치할 시기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내 아버지도 백작 각하께서 원하실 때마다 종종 그러곤 하였으니까.
하지만 이리도 일찍? 아직 내 가문을 운영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은 참에 너무 막대한 임무를 주는 게 아닌가.
아니지.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섭정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내어 백작 각하에게서 여러 지원을 받게 된다면 우리 가문은 보다 찬란하게…….
“주인님.”
서슬 퍼런 음성에 상념이 깨어진다.
시선을 돌리자 엘프가 무념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무념 속에 들어선 한 줌의 증오가 내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약혼자 앞에서 추태를 부릴 순 없었다.
“필요한 건 없는…….”
나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엘프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제 딴에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있다지만 내 눈에는 무척이나 잘 보였다.
꿀꺽.
목울대를 타고 공포가 넘어간다.
저건 분명 고점이다. 유순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끓기 직전의 물이 잔잔한 것처럼 엘프의 분노도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였으니까.
어떻게든 지금 이 자리에서 매도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응접실을 나서는 순간 에실리는 물론이고 내 목까지 잘려나갈 것이다.
“……생각해보니 필요한 게 있기는 하군. 이리로 와라.”
내가 손을 들어 까딱거리자 엘프가 한달음에 다가온다.
일단 부르기는 했는데 어떤 식으로 매도해야 하지? 뺨을 때려야 하나? 아니다. 알몸 산책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마조 엘프가 그딴 시추에이션에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이 방법 밖에는 없다.
“천한 노예주제에 두 발로 꼿꼿이 서 있는 게 마음에 안 든다.”
“테오라드 경……?”
에실리가 의아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무를 순 없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머금으며 찻잔을 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눈으로 나를 마주보는 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아. 어제 그렇게 훈계했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나보군.”
찻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찻잔 속의 홍차가 찰랑거리는가 싶더니 물줄기가 되어 엘프의 머리에 쏟아진다.
“햐악!?”
뜨거운 김이 일어남과 동시에 엘프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죄에… 죄송해여어…….”
순진함을 연기하는 붉은 눈동자에 물기가 서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장 위로해주고 싶을 정도의 처연한 안색이겠으나 내막을 아는 내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
저건 그만둬달라는 무언의 요청이 아니라, 더 매도해달라는 기대감에서 보인 표정이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건가? 아직도 두 발로 서 있는군. 건방진 종년이!”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챙그랑! 찻잔이 깨어지며 사방으로 조각난다.
“테오라드 경!”
에실리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였다.
시발! 나도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에실리! 부탁이니까 제발 가만히 있어!
“네 발로 기어 다니며 파편을 주워 담아라. 네 년이 할법한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하지만 주인님…….”
“토 달지 마라. 가증스러운 것아.”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엘프가 울먹거리며 주저앉았다.
홍차에 젖어버린 은발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아파온다. 엘프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내가 한 짓이니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맨 손으로 유리조각을 주우면 손이 상할 것이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자 엘프가 나를 올려다본다. 한 순간 엘프의 안면에 비친 그늘에 내가 흠칫하며 손수건을 도로 집어넣었다.
“……너 같은 천박한 것이 할 일로는 제격이군.”
재빨리 말을 바꾼 다음 의자에 앉았다. 에실리의 시선이 따가워서 차마 시선을 들진 못하고 테이블의 다과만을 응시하였다.
싸늘한 침묵이 장내에 깔린다. 엘프가 사부작거리며 유리 조각을 주워 담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에실리도 나도, 서로 어쩌지를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엘프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용서해주세요 주인님. 이대로 가다간 유리조각에 손이 베여버려요…….”
네가 손수건 주지 말라며 미친년아!
“아앗! 베여버렸어요. 손에서 피가…… 피가아……. 생리도 아닌데 피가 나오고 말았어요, 주인니임…….”
에실리 앞에서 그런 경박한 소리 하지 말라고! 내가 대체 어떻게 반응해줘야 하는데!
“테오라드 경.”
서늘한 음색에 뒷목이 뻣뻣하게 당겨진다. 용기를 내어 시선을 들어보자 에실리가 경멸을 담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봅니다. 인의예지를 타고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망나니와 별 차이가 없는 분이셨군요.”
무섭다. 평소 상냥한 사람이 이리 매몰차게 나오니 배로 무서웠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내 인성이 쓰레기라는 것이 기정사실로 변하고 만다. 어떻게든 변명해야 한다. 어떻게든!
“에실리. 너는 오해하고 있어.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러는 것이 아니네.”
“하? 그럼 그 잘난 이유를 한 번 들어보죠.”
“그것이…… 나는 노예에게 상냥하게 굴면 죽는 병이 있네.”
내뱉고 나서 뒤늦게 헛숨을 들이켰다. 야 이 개 병신새끼야! 그딴 병이 어디에 있냐고!
에실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경멸에 난해함을 더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혐오를 담아 짓누르듯 입술을 달싹였다.
“대관절 그게 무슨 궤변입니까?”
에실리의 비난을 듣자 온몸에 탈력감이 느껴진다.
아아. 이게 현실이 맞는 걸까.
어쩌면 나는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주이니잉…… 손가락이 너무 아파여엇……!”
그것도 아주 지독한 악몽을…….
아무래도 내 인생은 망했다.
여기까지 몰아붙여진 마당에 기사회생을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나 다름없었다.
“테오라드 경, 무어라 변명이라도 해보세요!”
미안하지만 변명은 아까 했어 에실리. 이제 그냥 맘 편히 나를 혐오해줘. 악역은 익숙하니까…….
내가 아무런 말없이 침음을 흘리니 에실리는 혀를 쯧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한 번 쏘아본 에실리가 치맛자락을 들고 엘프 곁으로 가더니 무릎을 굽혀 앉았다.
“유리를 집는 건 그만둬요. 당신이 아무리 노예라지만 부당한 명령까지 따를 필요는 없어요.”
“하, 하지마안…….”
“원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 괜한 공포심에 스스로의 신변에 위협을 끼치지 마세요.”
틀린 말이 아니다. 저 말을 노예가 아니라 나한테 해줬으면 완벽하게 맞는 말일 텐데.
에실리의 생각과는 달리 엘프는 자신이 원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에실리가 자신에게 달라붙으니 눈썹이 꿈틀거리고 있잖은가. 짜증나니 꺼져달라는 완고한 표현이었다. 물론 그 속내를 에실리가 알아차릴 리 없었다.
“어찌 이리 가엾고 기구한 인생을 삶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만민을 굽어 살핀다는 빛의 신께서 종족에 차별을 두기라도 하는 걸까요. 애처롭기 짝이 없습니다.”
저거 분명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내가 빛의 신의 교리를 어겼다고 비난하고 싶은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억울하다!
“그거 신성 모독이네, 에실리.”
“테오라드 경은 조용히 하십시오.”
찌릿. 표독스러운 눈빛이 무섭다. 나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과자를 하나 집었다. 티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손이 덜덜 떨린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연거푸 경멸의 시선을 받는데 의기소침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에 있을까. 고통 없이 죽는 버튼이 있다면 당장 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엘프.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네에? 저는 주인님의 성노예…….”
“그런 비인간적인 멸칭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태어날 때 신을 대신하여 부모가 점지해주는 고귀한 이름을 말하는 겁니다.”
“자, 잘 모르겠어요… 저 같은 노예한테 이름 따위는 필요가 없는 걸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가요?”
다소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은 에실리가 엘프의 팔목을 잡아 일으키려 들었다.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괜찮겠지요. 저랑 같이 성으로 가도록 해요. 그곳이라면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아니. 그건 안 된다!
폭탄을 넘기는 건 좋지만 그게 백작가가 돼서는 본말전도였다!
내가 발끈하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에실리! 농담이 과하다! 이 노예는 내가 산 것이네!”
“하? 그따위 노예 증서로 지성을 가진 존재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소유할 순 없지만 소유권을 주장할 순 있지. 좋은 말로 할 때 내 노예에서 손을 떼!”
“테오라드 경. 당신은 정말…….”
이를 빠득 깨문 에실리가 엘프의 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실리는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한 채 숨을 죽이더니, 한숨을 깊게 내쉬곤 나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죠. 이 엘프가 선택하는 사람에게-”
“저, 저는…….”
에실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프가 내 바짓단을 붙잡았다.
“주인님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기로 맹세했어요. 주인님께서 저를 임신시키고 길바닥에 버리신다고 해도 저는 받아들일 거예요. 그러니 이제 와서 다른 주인님을 모시고 싶지는 않아요…….”
에실리에게 내가 쓰레기라는 걸 확인사살 시켜줘서 고맙다. 이 개 같은 년아.
“무슨…….”
에실리는 그 사실에 망연자실했는지 나와 엘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어째 그녀의 고귀한 걸음걸이마다 실망이 서려있는 것만 같았다.
발소리를 들은 사용인들이 문을 열어주었고, 에실리는 열린 문을 통해 빠져나가버렸다. 중간에 뒤도 돌아보지 않은 걸 보면 아마 화가 많이 났으리라.
“히끅. 죄, 죄송해요 주인니임……. 저 때문에엣…….”
반면에 나는 화낼 기력도 없어진 상태다.
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이상함을 느낀 하비드가 한달음에 걸어왔다.
“가주님. 대체 무슨 일이…….”
하비드는 바닥에 주저앉아 메이드 정복의 앞치마에 유리조각을 주워 담는 엘프와, 혼이 나간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땀을 삐질 흘렸다.
“찻잔이 왜 깨어져 있는……? 그보다 다치시진 않으셨습니까, 가주님?”
“……괜찮아.”
몸은 다치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마음이 부서져버렸다.
*
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에실리는 턱을 괸 채 시시각각 변해가는 창밖의 풍경을 흐린 눈으로 응시하였다.
‘오늘의 테오라드, 확실히 이상했어.’
에실리가 알고 있는 테오라드는 자상한 성정의 품격 있는 귀족이었다.
사용인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예들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유약한 것은 아니었다.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목소리를 낼 줄 알았으며, 백작인 아버지 앞에서도 스스로의 의견을 자신 있게 펼칠 줄 아는 자였다.
더해 스스로가 가진 권리에 대한 의무를 도외시하지 않았고, 매사에 열심히 임하려는 태도는 뭇 귀족들의 모범이 되었다. 작위만 있는 시정잡배들하곤 확실히 달랐다.
에실리도 그런 테오라드의 매력에 끌려서 어린 시절 아버지를 졸라 약혼을 따내었었다.
평생을 믿고 맡겨도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왜?’
세상에 둘도 없을 정도로 바른 성정의 사내가 어째서 하루아침에 개망나니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에실리는 그 사실을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엘프에게 미혹을 당했나?’
얼마 전 테오라드가 성노예로 샀다던 엘프.
자신을 두고 성노예를 샀다는 것에서 화가 나기는 했지만 참을 순 있었다. 귀족들이 집안에 성노를 두는 것이야 흔한 양상이었으니까.
제아무리 여색에 취미가 없는 테오라드라고 해도 쌓이고 쌓인 정욕을 풀 방법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테오라드의 저택에서 엘프를 봤을 때 저도 모르게 질투가 나고 말았다.
‘아름다웠어.’
평소 미인이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온 에실리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엘프는 매력적인 미색을 뽐내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은발은 투명한 비단과 같았으며, 붉은 눈동자는 강옥을 닮은 듯 맑게 빛나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입술과 굴곡진 몸매는 또 어떤가. 과연. 서큐버스를 미모로 이길 수 있다는 종족다운 외양이었다.
하나 질투를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기로 하였다. 그것은 귀족답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테오라드를 밝게 맞이하고 본래 전하려던 말을 꺼냈다.
그런데.
─ 너 같이 천박한 것이 할 일로는 제격이군.
테오라드는 대뜸 엘프를 매도하기 시작했다. 그건 평소 알고 지내던 테오라드가 아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흐음.”
에실리는 생각했다. 테오라드가 왜 갑자기 망나니처럼 굴었을까. 망나니처럼 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곳에 있었나?
‘파혼을 원해서?’
그럴 리가. 백작가의 둘째 딸과 식을 올리게 되면 데하름 자작가의 명성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고 막대한 이익을 불러들인다.
인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귀족 사회에 있어서 상류 귀족과의 결혼은 신분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걸 제외하더라도 테오라드는 여태 자신에게 무한한 호감을 표현하였다.
마차 하나에 꽃을 가득 담아서 보내주기도 하였고, 자신이 손수 만든 공예품을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건네기도 하였다. 당장 이주 전에만 해도 자신이 직접 쓴 시를 눈앞에서 읽어주지 않았나.
그런 사람이 이 주 동안에 딴 사람처럼 변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율배반이란 아마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파혼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곳에서 테오라드가 눈치를 볼 존재는 엘프밖에 남지 않는다.
‘주인인 테오라드가 노예인 엘프의 눈치를 본다?’
이쪽도 이율배반적인 사고임은 매한가지였다.
둘 모두 정답이 아닌 것 같지만 둘 중에 정답이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을 상정하여 추론해도 그렇다할 논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골이 아파온다. 에실리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창을 닫고 마차의 좌석에 등을 기대었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조만간 테오라드가 섭정의 지위로 성에 오게 되면 단 둘이서 대화할 시간이 생길 것이다.
그때 이 해묵은 오해를 풀고 진실을 마주하면 되리라.
‘아버지한테는…… 알리지 말자.’
단면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에실리는 테오라드의 추태를 당분간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
늦은 밤.
나는 아버지의 석상 앞에 걸터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병신…….”
노예에게 상냥하게 굴면 죽는 병이라니.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개소리인가. 아무리 변명이 급하다고는 해도 그딴 개소리를 내뱉으면 안 되는 거였다.
차라리 전 날에 엘프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지금 혼내는 거라는 식으로 둘러댔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어도 파국은 면했을 테니까.
“하아…….”
뒤늦은 후회에 한숨만 연거푸 흘러나온다.
누군가가 과거를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고 하였지만, 그건 후회할만한 과거를 만들지 않은 사람에게나 통하는 말이다.
과거를 되새기고 싶지 않아도 알아서 머릿속에서 재생되는데 어떻게 잊으란 말인가.
거기다 내가 추태를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약혼자였다. 에실리도 나도,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상태에서 서서히 진전되고 있던 관계가 한 순간에 박살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개 같은 엘프.’
그 간악한 악마 년이 일부러 나를 파국에 밀어 넣은 게 분명하다. 나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기 위해서 주변 관계를 모두 파탄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은가?
분한 마음에 이를 빠득 깨물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목숨줄을 저쪽이 쥐고 있는데 내가 발버둥을 쳐봐야 엘프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내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면 빠질수록 저 악마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원하는 대로 이끌려주되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내야 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활로는 열릴 것이다. 언젠가는…….
슥.
억지로 희망을 붙잡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가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편지? 실링 왁스에 찍힌 인장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갑자기 웬 편지인가 싶어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는 이게 노예상의 답변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마녀 일일 특송으로 편지를 보냈으니 아마 편지를 받은 그 자리에서 답변을 작성했으리라.
분명 환수를 하겠다고 답변을 보냈겠지?
“아. 편지를 전해줘서 고맙…….”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받으며 고개를 든 나는 온몸의 세포가 얼어붙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천만에요.”
내게 편지를 전해준 존재.
“주인님.”
그녀는 다름 아닌 엘프였기 때문이다.
나를 내려다보며 영문 모를 미소를 짓고 있는 엘프의 모습이 소름끼치게 다가온다.
막다른 길에서 고양이를 마주한 쥐가 이럴까. 지금의 나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이 상황이 두렵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티를 냈다가는 엘프의 의심이 확정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나는 목의 브로치를 매만지면서 최대한 자약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흐음.”
물론 속내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다 못해 수십 명으로 나뉜 자아가 실수로 세계 멸망 마법진을 연성시킨 마법사마냥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나는 명문 귀족가의 자제로 태어나 수많은 처세술을 익힌 몸.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침착하게 사고해야만 한다.
‘대체 왜 엘프가 편지를 전해준 거지?’
하비드에게 편지를 부치라 말했으니 도착한 편지도 하비드가 직접 전해줘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하비드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편지를 하비드가 아니라 엘프가 가져왔다는 것은 즉.
‘중간에 갈취를 당했다……?’
하비드는 매일 아침 우편함을 확인한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하비드가 편지를 들고 왔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엘프가 편지를 들고 온 것은, 엘프가 그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의로 우편함을 열고 편지를 가져왔다는 소리가 된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내게 매도를 당하고 싶어서 일부러 저택의 규칙을 어겼거나.’
첫 번째 가정.
엘프는 지금 저택의 규칙을 어긴 것을 내게 어필하여 벌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짓고 있는 미소 또한 진실을 알아서 내비치는 미소가 아니라 곧 벌을 받겠구나, 에서 비롯되는 기대감일 확률이 높다.
‘아니면 내가 자신을 반품하려는 것을 눈치 챘거나.’
두 번째 가정.
엘프는 내게 전해주려는 편지를 미리 읽어보고 대강의 상황을 눈치 채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짓고 있는 미소는 나를 어떻게 죽여 버릴까에 대해 행복한 고민을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혹은 둘 모두일 가능성도 있어.’
세 번째 가정.
이건 생각하기도 싫지만 엘프가 내게 매도당하기 위해 편지를 갈취했다가 우연찮게 노예상인의 편지라는 걸 확인했을 경우다.
이 경우에 나는 꼼짝없이 엘프의 장난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일단 진정하자.’
셋 모두 현실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끔찍한 상황이지만 사건이 발생했으니 어떻게든 진행은 해야 한다.
여기서 침묵한 채로 가만히 있는다고 상황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최악이 세 번째 가정이라면 차악은 두 번째이며 그나마 최선은 첫 번째 가정이다. 나는 첫 번째 가정이 정답이기를 기도하며 편지의 인장을 살폈다.
‘떨어지거나 부서진 흔적은…… 없다.’
실링 왁스로 봉인한 인장은 발송자의 계급이나 가문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보안의 형태를 띈다.
수신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편지를 뜯어보려고 하면 어떻게든 그 흔적이 남는다는 소리다.
그러나 이 편지에 봉인된 인장은 더없이 깔끔하다. 엘프가 손으로 뜯어본 건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나는 엘프를 힐끔 흘겨본 후에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마법으로 내용을 확인했을 가능성은?’
투시 마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대마법사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 명확한 엘프에게는 독자적이 마법 체계가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종잇장을 투시하는 것 정도는 손쉽게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투시가 만능은 아닐 것이다. 종이가 여러 겹으로 접혀져 있는 바람에 글씨가 얽히고설킨 편지의 내용을 엘프가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가능하다고 해도 해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하다. 그랬다면 이리로 바로 가져오지 못했겠지.
실링 왁스에 찍힌 인장으로 편지의 내용을 유추했을 가능성 또한 낮다.
범선과 돌고래가 그려진 이 인장은 노예상의 신분이나 가문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편지를 봉하기 위해 사용한 일회용 인장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첫 번째 가정이 맞아떨어진다. 이 엘프는 단순히 내게 매도당하기 위해서 편지를 중간에 갈취했던 것이다.
다른 의도는…… 없기를 바라자.
“누구에게 온 편지라는 말은 없었느냐?”
확인 차 말을 던지자 엘프가 순진한 눈방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주인님. 우편함에 편지가 있기에 들고 온 거예요.”
“그렇군.”
저게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믿기로 하였다. 그 편이 내 정신건강에 이로웠으니까.
그럼 이제 편지를 확인할 차례. 나는 엘프에게서 등을 돌린 다음에 떨리는 손으로 인장을 뜯고 편지를 꺼냈다.
『위대하시며 존엄하신, 명망 높은 데하름 자작가의 테오라드 나으리께.
나으리. 보내주신 편지는 잘 보았습니다.
나리께서 현재 어떠한 상황에 처하셨을지도 훤히 보였고요.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제 와서 환수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불공정 계약이라고 하셨는데 대체 어디가 불공정입니까? 저는 나리께서 하는 질문에 선심을 가지고 대답하였습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만약 나리께서 ‘이백오십 살이 넘은 엘프는 위험한가?’ 라고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제가 억울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조실부모라고 하셨습니까? 죄송하지만 저희 부모님께서는 모두 팔팔하게 살아계십니다. 반면에 나리의 부모님께서는…… 심심한 조의를 표하겠습니다.
아.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저를 잡으시려 수고를 들이진 마십시오. 저는 이제 벌 만큼 벌었기에 마하칸 공국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려고 하니 말입니다.
설마 국경을 넘어서까지 저를 쫓으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그것이 자칫 제국과 공국간의 불화로 번진다면 나리께서는 지엄하신 황제 폐하에게 쓴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날이 찹니다. 마녀도 마뜩찮은 표정으로 저를 지켜보고 있기에 이만하고 글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미모의 엘프와 평온하고 즐거운 삶을 영위하시길.
모두의 존경을 받는 테오라드 나리에 비하면 한없이 미천한 노예상 조빌아라가 안타까움을 느끼며.』
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이, 이 개자식이……!’
무시하고 있었다! 이 노예상은 분명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네놈은 대체 나를 무어라 생각하는 거냐! 나는 명망 높은 데하름 자작가를 다스리는 주인이자 백작 각하에게 신임을 받아 부백작을 겸하고 있는 귀족 중에 귀족이며……!
“주인님?”
……정신 나간 엘프 노예에게 핍박받는 처량하고도 형편없는 인생이었다.
“흐흠.”
나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종이를 구기고 품속에 집어넣었다.
뒤를 돌아보자 엘프가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닐까 싶어서 안절부절하는 연기가 수준급이다.
역시 첫 번째 가정이 맞는 걸까. 만약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의 엘프는 내게 매도당하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고작 편지 한 장을 갈취하여 전해줬다는 걸로 벌을 주기는 힘들지 않은가? 마땅히 매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사용인들이 이 같은 잘못을 벌였다면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하고 그냥 돌려보냈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내가 엘프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노예가 제멋대로 우편함을 뒤지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저는, 저는 그런 건줄 잘 모르고…….”
“말대꾸하지 마라 건방진 년아!”
내가 윽박을 지르며 엘프의 머리칼을 위로 잡아당겼다.
“햐악!?”
그러자 엘프가 까치발을 들고 눈을 질끈 감는다. 고통스러운지 이를 악물면서 눈물을 찔끔 흘려대고 있었다.
먹히고 있다! 좋아. 여기서 좀 더 매도의 수위를 높여보자.
“편지에 네 년의 손때가 묻어서 불쾌함이 이루 말할 때가 없다. 나의 이 불쾌함을 네 년이 대체 어떻게 해소시켜줄 거지?”
“죄에…… 죄성해여어…….”
“내가 지금 너 같이 하찮은 노예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이러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공포에 질린 척 파르르 떨던 엘프가 눈을 반개하여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기어린 적안에 인상을 쓰고 있는 내가 비친다.
엘프는 양 손을 들어 내 팔목을 붙잡더니 울먹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여, 역시 돼먹지 못한 암퇘지인 저는 주인님께 벌을 받아야 해요. 그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으니 이 손은 놔주세여 주인님……. 너무 아파서어…….”
……어?
내가 원한 전개는 이게 아닌데. 여기서 좀 더 매도하다가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들어가라!’같은 대사를 내뱉어주고 끝낼 생각이었다.
‘여기서 벌을 더 받겠다고?’
마땅한 매도 방법을 생각해두지 않은 내게 있어서는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인 소리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내 신변과 식솔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어떻게든 창의적인 매도 방식을 고안해야만 한다.
머릿속의 주판을 열심히 굴리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부릅떴다.
‘실링 왁스!’
그리고 편지. 둘의 연관관계를 잘만 이용한다면 엘프가 만족할 수 있는 매도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사악한 미소를 연기하며 엘프의 머리채를 붙잡은 손을 놔주었다.
“네가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마. 나를 따라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