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집무실은 신성한 곳이었다.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며, 가주의 허락이 없이는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으니 경외의 감정까지 느껴지게 만든다.
더구나 집무실의 한 쪽 벽면에는 여태 데하름 자작가를 이끌어왔던 조상님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었기 때문에 가문의 전통이 절로 엿보일 정도였다.
“들어와라.”
“네에엥…….”
그곳에서 나는 역대 가주들 중 최초로 노예를 집무실에 들였다. 그것도 나신의 몸을 하고 있는 노예를 말이다.
“부끄러워여…….”
양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엘프가 쭈뼛거리며 들어온다. 음부는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가고 말았다.
오해가 있을까봐 말해두는데 내가 벗으라고 한 게 아니다. 벌을 준다니까 지가 알아서 벗었다. 미친년이 진짜.
나는 저 어처구니없는 엘프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집무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책상을 살펴보니 비즈형 실링 왁스와 멜팅 스푼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깃펜도 마찬가지. 다행이다. 이걸 이용하면 오늘 하루는 평온하게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필요한 재료들이 집무실에 있기에 오기는 왔는데, 신성한 집무실에서 이런 더러운 행위를 해도 되는 것일까?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차마 시작을 하지 못하겠다. 괜히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떨린다. 초상화 쪽으로는 아예 시선을 두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하나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여기까지 와놓고 엘프에게 돌아가라고 말해버린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저승 편도 티켓을 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해요 조상님들.’
속으로 눈물을 머금은 내가 몸을 돌려 엘프를 마주보았다.
달빛을 받아 맑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아래로 겁먹은 표정이 걸린다. 그러나 옅게 미소 짓는 입가에는 모종의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의 성고문을 시작하도록 하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이 엘프를 매도해야만 한다.
“서, 성고문이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엘프를 보니 억하심정이 밀려들어왔지만,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점잖은 자태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네 말대로 벌을 주고자 함이다. 이제 와서 두려워졌나?”
“아, 아니에요…….”
“흥. 그럼 잠자코 내 말이나 경청하도록 해라.”
경멸의 미소를 지어준 내가 엘프를 등지고 집무 책상 뒤편의 창가로 걸어갔다.
별 뜻이 있는 건 아니고, 표정연기가 힘들어서 안면근육을 잠시 풀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밤에 그토록 훈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네 년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더구나.”
그러나 목소리는 최대한 근엄하게. 엘프가 원하는 냉혈한 사이코패스를 착실하게 연기하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편지다. 말로 안 되는 걸 깨달았으니 네 년에게 편지를 한 장 써주고 싶더군.”
지금 내가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엘프에게 무언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전조 없이 무턱대고 성고문을 시작했다가 엘프 쪽에서 ‘이건 좀 별로네’같은 태도를 보인다면 낭패였으니까.
그러니 고객인 엘프에게 성고문 상품을 미리 말해줌으로서 취사선택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엘프가 혹여 언짢은 표정을 보인다면 성고문 경로를 바로 수정할 수 있게끔.
내가 생각해도 꽤나 똑똑한 처사였다.
“하지만 말귀를 못 알아먹는 버러지가 종이에 쓴 편지로 내 의중을 파악할 순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네 년이 쉬이 잊을 수 없게끔 조치를 취하도록 하지.”
“조, 조치라고 하시면……?”
“그건 바로 네 몸에 글씨를 새겨 넣는 것이다. 덜떨어진 몸뚱이에 이 몸의 필체를 새겨 받을 수 있으니 네 년에게도 충분히 은혜로운 일이겠지. 안 그런가?”
상품 설명은 끝났다. 이제 고객의 반응을 확인할 차례다.
나는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뒤에 몸을 돌려 엘프를 바라보았다.
결과는…….
“너무해요 주인니임……!”
대성공이다!
속으로 쾌재를 지른 내가 책상 앞의 의자를 꺼내 앉았다.
“너무하고 말고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이다. 짜증나니 징징거리지 말고 책상 위의 물품을 아래로 내리도록 해라.”
“주인님. 이번 한 번만 용서를…….”
“당장!”
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엘프가 어깨를 움찔 떨더니 책상 쪽으로 걸어왔다.
“대들어서 죄송해여어…….”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중얼거린 엘프가 책상 위의 서책과 장식품들을 하나하나 바닥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나는 책상 위에 마련된 초에 불을 켠 뒤 멜팅 스푼을 올려 거치했다. 그 위에 비즈형 실링 왁스 몇 알을 올린 다음 깃펜의 끝자락을 다듬었다.
잉크 또한 충분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내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책상의 평평한 면을 툭툭 두드렸다.
“그만하면 됐다. 이제 책상 위에 올라와서 누워라.”
“주, 주인님?”
“하아. 몇 번이나 말해야 하지? 나는 명령하고 너는 따른다. 그러니 내 말에 번복하지 마라. 의문이나 당황의 감정을 가지지 말란 말이다.”
“네, 네에…….”
울먹거리는 대답에 미미하지만 즐거운 기색이 깔린다. 내가 턱짓으로 행동을 재촉하자, 엘프는 책상에 엉덩이를 올리더니 그대로 상체를 눕혔다.
막상 누우니 부끄럽다고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러한 연기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엘프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부끄러운 건 나 또한 매한가지였다. 나체의 여자가 집무 책상 위에 누워있는데 어떻게 정상적인 감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나는 냉혈한 사이코패스.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최면을 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멜팅 스푼을 들어올렸다. 멜팅 스푼에 올려놓았던 비즈형 실링 왁스는 잘 녹아서 액체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부끄러운가?”
내가 싸늘히 내려다보며 읊조리자 엘프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조금은요…….”
“부끄럽다면 부끄럽지 않게 해줘야겠군. 옷을 입혀줄 터이니 손을 치워라.”
“……주인님?”
“내게 의문을 가지지 말라고 했을 텐데.”
협박조로 말하자 엘프가 마지못해 손을 내렸다.
그러자 드러나는 가슴은 내 생각보다 절경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인데.’
적당히 크고 탐스러운 가슴이 중력에 의해 살며시 눌려있는 광경이 작금의 상황와는 상관없이 야릇하게 다가온다.
가슴이 정도 이상으로 퍼지지 않게끔 모양이 잡혀있어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가슴의 탄력이 인위적이지는 않았다. 요즘 마도 기술이 워낙 발전해서 가슴 성형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자연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신을 차린 내가 멜팅 스푼을 천천히 기울였다.
“이를 악물어라. 조금 뜨거울 테니.”
스푼에서 흘러내린 실링 왁스가 물 섞은 치즈처럼 늘어지더니 엘프의 분홍빛 유두에 맞닿아 흘러내렸다. 놀란 엘프가 허리를 젖히자 가슴이 한 차례 출렁거린다.
“하윽, 끗……!”
확실히 뜨겁긴 한 모양인지 엘프가 입술을 꾹 깨물며 어깨를 움찔 떨었다. 꽉 쥔 주먹에서는 고통을 참아내려는 의지가 한껏 엿보일 정도였다.
‘좋아하는 거 맞나?’
반응이 너무 격렬하니 해서는 안 될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어버린다. 그러나 의심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나는 엘프의 다른 쪽 가슴에도 실링 왁스를 부어버린 다음에 멜팅 스푼을 촛불 위에 다시 거치하였다.
자연스럽게 비즈형 실링 왁스를 스푼 위에 몇 알 올린다음 엘프의 안색을 살펴보자, 엘프는 상기된 얼굴을 한 채로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헤으, 하으웅…….”
다행이다. 뚝뚝 떨어지는 촛농과는 달리 한꺼번에 녹여서 부어버리는 실링 왁스가 엘프의 취향에 좀 더 와닿은 모양이었다.
반면에 나는 이러한 행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묘하게 살 타는 냄새가 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티를 낼 수는 없다. 나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깃펜을 들었다.
“옷조차 아까운 네 년에게 어울리는 복장이군. 그렇지 않은가?”
“네, 네엣…… 저처럼 더러운 암퇘지에게는 이 정도도 과분해여어…….”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말투가 내게 확신을 전해준다. 이건 먹힌다!
흐름을 가져왔으니 이대로 천천히 내가 준비한 것들을 풀어내면 될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이 엘프는 알아서 만족하고 집무실을 떠나리라.
‘완벽해!’
스스로의 재치에 칭찬을 던진 나는 깃펜에 잉크를 적신 다음 들어올렸다.
이제 엘프의 배에 적절한 문장을 적은 다음 실링 왁스를 재차 붓고 가문의 인장을 찍어버리면 매도의 완성이었다.
그래. 적절한 문장을 적으면…….
‘그런데 대체 뭐라고 적어야하지?’
배에 적는 글씨는 사실상 이번 성고문의 하이라이트. 방으로 돌아간 엘프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배에 어떤 문구가 새겨졌는지 확인하는 것이 이 매도의 마무리 단계였다.
내가 생각해도 발상은 확실히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인 문구로는 이 변태적인 성정의 엘프를 절대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보다 천박하고, 눈살이 찌푸려지는 문구가 필요하다.’
문제는 내가 그런 걸 지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여색은커녕 에실리 하나만을 보고 살아온 재미없는 인생에서 기발함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하나 계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경험하지 않아도 경험자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탁란(浊乱)의 보고가 존재하지 않았던가.
‘음란한 홉고블린 메이드.’
저자가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심히 궁금한 그 책은 나도 한 번 읽은 적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다가 헛구역질을 했을 정도니 그곳에 분명 쓸 만한 구절이 있었으리라.
나는 엘프의 배에 손을 올려놓은 채 과거의 기억을 찬찬히 헤집었다.
─ 코끼리 불알을 본 적이 있나? 없다고? 잘 되었군. 지금부터 네가 보는 게 코끼리 불알일 테니 말이다. 자! 두 눈을 부릅뜨고 네 주인의 불알을 목도하도록 하라!
왜 이딴 대사가 있었던 거지? 이건 아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세상에 낭만은 사라지고 없지.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있는 이 시대에 진실한 사랑이란 허상에 불과해. 그러나 홉- 고블린이여! 이것만은 명심하라. 네가 나와 관계를 가지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 그 누구보다 너를 사랑할 것이니!
나 이거 어떻게 읽었던 거지? 어쨌든 이것도 아니다.
─ 잠자는 공주의 자궁목에 왕자의 귀두로 키스를 시켜줄 차례군. 그리하여 네 성욕이 눈을 뜨게 해주마. 조금 아플 테지만 꾹 참아보게나.
진짜 지랄한다 시발!
‘아버지는 대체 왜 이딴 걸 한정판 양장본으로 산 겁니까?’
어이가 없어서 화가 다 났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호흡을 가다듬은 엘프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일단 저 세 대사를 어떻게든 짜깁기해서 매도의 문장을 만들어보자. 머릿속에서 열심히 단어를 재배치하던 내가 깃펜을 쥔 손에 힘을 주어 획을 그었다.
“하걋.”
엘프가 간지러운지 몸을 떠는 바람에 첫 획이 엇나가고 말았다.
나는 낮게 한숨을 쉬며 자연스럽게 엘프를 노려보았다.
“숨을 참아라. 편지지가 움직여서야 되겠나?”
“죄, 죄송해엿…….”
쯧. 혀를 찬 내가 시선을 내려 엘프의 배에 문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세 대사에서 써먹을 만한 단어를 적절히 짜깁기하니 그럴듯한 매도의 문장이 만들어진다. 이대로 완성한 다음 가문의 인장을 찍고 돌려보내면 되리라.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코끝이 예민해진다. 뜨거운 실링 왁스를 엘프의 몸에 부어버렸을 때 발생한 연기 때문인가? 아니면 집무실을 환기시키지 못해서 공기 중에 먼지가 떠다니는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시큼한 감각이 코 끝에 잔재해 있어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기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아내었다.
문장을 다 완성시킨 다음에 기침을 하는 편이─
“엣츕!”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침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반동으로 어깨가 들썩이고 손이 꾹 눌린다.
‘망할.’
잠시 당황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매도의 자세에서 벗어났다고는 해도 기침 한 번 정도야 엘프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 줄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래. 이대로 문장을 완성시킨 다음에 엘프를 돌려보내면 될 일이었다.
나는 다른 손으로 입가를 닦아낸 다음 시선을 내렸고, 생각 이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어, 어……?’
기침의 반동으로 손을 내리눌렀던 것 때문인지 깃펜의 끄트머리가 엘프의 살갗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
많이 들어간 건 아니었다. 그냥 조금. 이 정도면 피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내가 깃펜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주륵─
그러자 거짓말같이 피가 방울지어 흘러내렸다. 비록 한 줄기에 불과하였지만, 이건 전혀 예상했던 일이 아니었다.
‘좆됐다.’
식은땀이 물처럼 흐른다. 엘프가 자신의 신체를 훼손시킨 것을 좋아할까? 다른 행위라면 모르겠지만 이건 피를 낸 것이었다. 그것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실수에 의해서.
그래도 혹시 모른다. 엘프가 이런 것도 좋아할 수 있지 않은가. 두려움을 꾹 참은 내가 엘프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엘프도 당연한 것처럼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
다만 엘프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는 관용적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마찬가지로, 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한다는 통상적인 어구도 시인들의 너스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
그런데 지금은 이해가 간다. 이해가 가다 못해 왜 저런 말들이 생겨났는지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엘프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나는, 지금 세상의 그 누구보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흐르는 시간을 붙잡지 못하면 내가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사고가 마비된다. 애써 무표정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내면의 나는 사형 판결을 앞둔 범죄자처럼 원초적인 공포에 질려있었다.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판장인 엘프에게 내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봐도 내 실수가 명확한 시점에서……?
‘잠깐만. 실수?’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엘프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아니다. 단순히 내 성고문의 방향이 자신이 원했던 바와 달라서 짜증을 내고 있는 것뿐일 터였다.
그렇다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의 이 행위가 ‘실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으로 만들어서 유죄를 무죄로 둔갑시킬 필요가 있었다.
“짜증나는군.”
변론의 첫 마디는 감정의 발현이다. 내가 당당하게 나오면 엘프도 기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엘프는 내 말에 날카로운 인상을 풀며 의아함을 머금었다. 이 정도면 반쯤은 성공한 것이다.
“내가 분명 숨을 참으라고 했는데 어째서 네 년은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것이냐? 내 집필 행위가 같잖게 보이는 모양이지?”
다음은 당위성의 주장이다. 재채기를 해서 저도 모르게 깃펜을 찔렀다는 가정을 없애고, 집필 과정에서 엘프가 숨을 쉬었기에 짜증나서 깃펜을 찔러 넣었다는 새로운 가정을 형성한다.
전자는 거짓이고 후자가 진실이다. 엘프가 이런 착각을 하게 만들게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내가 목의 브로치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해라. 쓰레기 같은 것아.”
최후 변론이 끝났으니 이제 재판관의 판결만이 남았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며 엘프를 바라보았고, 엘프는 멍하니 입을 벌리더니 곧 시선을 내리며 낮게 흐느꼈다. 뾰족한 양 귀도 시선에 따라 슬며시 처진다.
“죄송해여어……. 하지만 숨을 참아버리면 고통스러워서어…….”
판결은 무죄였다!
생존에 대한 희열이 내 심장박동을 널뛰게 만든다. 나는 속으로 환호라도 지르고 싶은 심경을 꾹꾹 억누르면서 코웃음을 흘렸다.
“미천하여 도구에 불과한 것이 제 고통에 신경을 쓰는구나. 웃기는군. 인간 사회에서는 귀천이 명확함을 시종장이 따로 교육해주지 않더냐? 아니면, 교육을 받았는데도 네 덜떨어진 머리로는 주인의 명령이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 건가?”
“흐끄윽. 덜떨어진 노예라 죄송해요 주인니임…….”
“과연 버러지다운 반응이군. 스스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칭찬해 마땅한 일이나 처지를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거푸 실수를 저지르는 만행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내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처분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내가 싸늘하게 노려보자 엘프가 입술을 꾹 깨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금방이라도 엉엉 울어버릴 것만 같이 떨리는 눈동자를 보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당장 꼭 껴안아주면서 농담이었다고 달래주고 싶을 정도다. 실제로 그랬다가는 내 뼈마디가 분질러지겠지만. 저건 어디까지나 나를 가지고 놀려는 엘프의 연기에 불과하니까.
“그럼 마저 집필을 시작할 터이니 숨을 참아라. 숨을 참는 게 고통스럽다고 호흡을 들이쉬거나 내쉬는 순간 이보다 더한 체벌을 할 터이니 명심하도록.”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린 엘프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배에 힘을 주었다. 숨을 참은 것이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엘프가 숨을 참고 있는 시간동안 문장 작성을 끝내야한다.
만약 엘프가 도중에 숨을 쉬어버리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그도 그럴게 ‘이보다 더한 체벌’같은 건 애초에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시작하도록 하지.”
나는 깃펜을 들어 엘프의 배에 빠르게 글씨를 써내려갔다. 원래 생각한 문장을 되도록 짧게 축소한 다음 마침표를 찍고(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여 살며시) 깃펜을 들어올렸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 내용을 머릿속에 각인하라. 내가 살아있는 한 앞으로 네 인생에 낭만은 없을 것이다. 나의 착실한 성 노리개로서 성욕에 눈을 뜨고 창관의 매춘부마냥 살아갈 것이 네 년의 기구한 운명이다. 이를 부정하지 마라. 빛의 신께서도 네 인생에 드리운 어둠을 밝혀주지 못할 것이니.]
급하게 휘갈기긴 했지만 제법 그럴듯한 매도의 문장이 완성되었다.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쉰 다음에 깃펜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제 숨을 쉬어도 된다.”
내가 허락하자 호흡을 꾹 참고 있던 엘프가 숨을 들이마셨다. 헤엑, 헥. 개처럼 혀를 내밀며 산소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니 눈살이 찌푸려진다.
천박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시킨 짓이긴 하지만 확실히 보기 좋지는 않았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는 것으로 엘프에게 눈치를 준 다음 멜팅 스푼을 들어올렸다.
촛불 위에 장시간 올려놓았던 것 때문인지 실링 왁스는 완전히 녹아 뜨거운 김을 일으키고 있었다.
“편지를 다 썼으니 가문의 인장을 찍어 봉하도록 하겠다.”
엘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아, 안 대여…… 그거 너, 너무 뜨거워서 몸이 익어버리고 말 거예여…….”
“어쩌라는 거냐. 네 몸이지 내 몸이 아니지 않은가?”
“주인님…….”
엘프가 내 팔목을 붙잡으며 애원하듯 올려다보았지만 그만 둘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저건 더 해달라는 신호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놓아라.”
나는 엘프의 손을 뿌리친 다음에 멜팅 스푼을 기울였다. 배에 적어놓은 글씨가 실링 왁스에 덮어지면 곤란하니 아랫배 쪽으로.
처음보다 더 걸쭉하게 늘어진 실링왁스가 엘프의 아랫배에 맞닿아 흘러내렸다. 열기가 고르게 퍼지면서 미약한 연기가 새어나온다.
“하갸앗─!”
뜨거움을 참지 못한 엘프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지르며 책상을 손톱으로 긁어대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나까지 기분이 심란해진다.
그 사이, 아랫배의 굴곡을 따라 흘러내리던 실링왁스가 고간까지 이어진다.
실링 왁스가 다 식어서 굳어버리기 전에, 나는 가문의 인장이 각인된 도장을 들어 엘프의 아랫배에 힘주어 내리찍었다.
“흐긋!”
몸을 움찔 떨던 엘프가 곧 평온한 숨을 내쉬었다. 실링 왁스가 완전히 식어버려서 고통이 가신 탓이리라.
역시 이해가 안 된다. 이런 걸 대체 왜 좋아하는 걸까. 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을 머금으며 엘프의 배를 누르고 있던 도장을 떼내었다.
그러자 동그란 원 안에서 데하름 가문을 상징하는 홍관조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형적이 드러났다. 누군가의 피부에 해보는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모양이 제법 잘 나왔다.
아무튼 이제 끝이다.
“다 되었다.”
내가 오늘의 성고문은 끝났다는 의미로 엘프의 엉덩이를 찰싹 두드렸다.
“벌은 이만하면 되었겠지. 더는 볼 일이 없으니 네 허름한 방으로 기어들어가서 내가 손수 써준 편지를 읽도록 해라.”
“네에…….”
엘프도 만족한 모양인지 군말 없이 책상에서 일어나 방문으로 걸어갔다.
그동안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더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손을 닦아내었다. 더러운 노예를 만진 것이 불쾌하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혹시나 엘프가 뒤를 돌아볼 것을 대비하여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엘프의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방문을 나서고,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될 때가 되어서야 나는 기진맥진한 사람처럼 의자에 걸터앉았다.
“죽겠다…….”
사이코패스 연기도 하루 이틀이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로 억지로 성고문을 행해야 하니 정신적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저 미친 엘프년한테 목이 날아간다. 목숨만 문제인가? 이런 수치스러운 행위를 남에게 들켰다가는 가문의 위상과 내 평판이 지층을 뚫고 내려갈 것이다.
신경 써야할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소리다. 한숨만 연거푸 늘어난다.
‘내가 생각한 엘프 노예는 이게 아닌데…….’
처음 엘프 노예를 샀을 때 내가 예상했던 그림은 보다 온화한 것이었다.
식탁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밥을 먹자고 말을 건네면 저 따위가 그래도 되냐면서 감동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좋은 옷을 입혀주고 방을 챙겨주면 눈물을 글썽이며 주인님은 너무 자상하다며 고마워하거나.
어느 날 말없이 내게로 다가와서 손수 만든 꽃 화환을 머리에 씌워주며 배시시 웃는다거나…….
내 작은 배려에도 더없이 감동해주며 꽃다운 미소를 지어주는,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어리숙하면서도 귀여운 노예를 원했단 말이다…….
그런데 이 엘프는 대체 뭔가.
저택에 들어온 첫 날에 값비싼 항아리를 망설임 없이 깨트려버리고는 자기는 벌을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질 않나,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성고문을 원하며 내 정신을 실시간으로 갉아먹고 있었다.
‘왜 하필 내가…….’
다른 귀족들도 아니고 왜 하필 내가 저 엘프를 사버린 걸까. 후회가 엄습했지만 이제 와서 과거의 실패를 되새겨봤자였다.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린 내가 손을 들어 검지에 착용한 반지를 툭 두드렸다.
감시 오브젝트가 발동되면서 엘프의 방이 보인다.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방에 들어온 엘프는 문을 닫고 턱을 한 번 쓰다듬었다.
─ 곤란한데. 흐음.
뭐가 곤란하다는 거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엘프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방에 마련된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실링 왁스로 뒤덮인 가슴과 아랫배가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엘프는 거울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다음에 자신의 배에 적힌 문구를 읽어나갔다.
─ 푸흐.
그리고는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는다. 내게 보여준 거짓된 미소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본래 아름다운 외모인 엘프가 창가의 달빛을 받으며 웃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예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뭐어.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딱! 엘프가 손가락을 튕기자 예의 그 바람이 휘몰아치며 엘프의 몸을 말끔하게 청소해나갔다. 화상을 입은 피부도 마찬가지로 아물어갔다.
거기까지 본 내가 감시 오브젝트를 꺼트리고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나쁘지는 않았다라.’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피를 본 게 싫었지만 성고문 자체는 괜찮았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
잠깐만. 내가 왜 엘프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고 있는 거지? 저 따위 악마가 무슨 생각을 하건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않은가.
그래. 냉정해지자. 나는 엄연히 저 노예의 주인이다. 노예를 저택에서 퇴출시키는 건 엘프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권리란 말이다.
생각을 마친 내가 책상의 서랍을 열어 영지의 지도를 꺼내들어 펼쳤다.
‘분명 내 저택 근처에 관련 상가가 있었을 텐데…….’
내가 가진 힘으로 엘프를 이겨낼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제아무리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른 엘프라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폭발적인 방법을 말이다.
‘아. 여기에 있군.’
마침내 상가의 위치를 찾은 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갔다.
다음날 아침.
시원한 바람이 나뭇잎에 서린 광채를 흩트리는 중정에서, 시종장 하비드가 잘 손질된 구두를 앞세워 전대 가주의 석상 앞에 자리하였다.
“흠.”
허리를 꼿꼿이 편 하비드가 양 손으로 테일코트의 목깃을 붙잡아 절도 있게 털어낸 후 좌중을 둘러보았다.
집합 명령을 내린지 삼십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저택의 사용인 스물 한 명이 모두 모인 것을 보니 흡족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교육시킨 사용인들에게 흐뭇함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하비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용인들을 면면을 훑어보며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늦지 않게 잘 모여주었다. 오늘 이 자리는 다름이 아니라 전대 가주님을 욕보인 파렴치한을 찾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전대 가주님을 욕보였다니? 사용인들은 저마다의 의문을 가지며 서로를 돌아보았고, 하비드는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
“어떤 고약한 녀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희들 중 한 명이 전대 가주님의 석상에 소변을 누었더구나.”
소변? 사용인들 중 몇몇은 경악하고 몇몇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모두가 이 충격적인 사실에 동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말타오가 그랬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특징인 이 젊은 사내는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놈이 또.’
하비드는 예전부터 말타오의 이런 시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명망 높은 데하름 자작가에서 일하는 사용인치고 품위가 없어도 너무 없지 않은가.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인 인품을 갖추라는 것인데 저 망할 자식은 자유분방해도 너무 자유분방하였다.
이 참에 한 번 면박을 줘서 정신을 차리게 만드리라. 하비드가 마뜩찮은 기색으로 말타오를 향해 턱짓하였다.
“너, 말타오.”
대뜸 지목당하자 말타오가 놀라며 자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여기서 말타오라는 이름을 가진 사용인이 너 말고 더 있더냐?”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르신?”
“그래. 네가 생각하기에 범인은 누구인 것 같으냐.”
“갑자기 범인이 누구냐고 물으시면…….”
뺨을 긁적이며 대답을 망설이던 말타오는 문득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있다는 걸 눈치 채었다. 당황한 말타오가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쳤다.
“저는 절대 아닙니다! 제가 대체 왜 전대 가주님의 석상에 오줌을 지립니까? 정신병자도 아니고 말입니다!”
“하지만 너는 주말이 아닌 주중에도 이따금 술을 마시지 않더냐. 사용인들 중에서 주중에 술을 마시는 녀석은 너밖에 없다, 말타오.”
“허 참. 일과가 끝난 주중에 약주를 걸치는 걸 허락해 주신 건 다름 아닌 가주님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술을 마셨다고 한들 저는 사리분별을 못할 정도로 고주망태가 된 적은 없습니다.”
“기억을 못하는 게 아니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빛의 신께 맹세하건데 저는 결백합니다. 믿어주십시오 어르신!”
“흠.”
솔직히 말해 더 몰아붙이고 싶었지만 빛의 신에 대고 맹세한 사람에게 이 이상 추궁할 순 없었다. 그 자체가 신성 모독으로 오인될 여지가 있었으니까.
하비드는 혀를 쯧 차고는 다른 사용인들을 둘러보았다.
“말타오가 아니라면 다른 녀석들 중에 범인이 있겠구나. 누구냐. 지금 자백한다면 손가락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너그럽게 봐주겠다.”
그런다고 자백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모두가 숨을 죽이며 애먼 눈동자만 깜빡거리고 있자, 하비드의 이마에 격자로 힘줄이 돋아났다.
“좋다. 너희들 중에 범인이 있음이 명확한데 자백할 생각은 없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구나. 가까운 시일 내에 저택 근처의 교구에 이단 심판관의 파견을 요청하도록 하겠다.”
이단 심판관이라는 소리에 한차례 술렁거림이 일었다. 이게 이단 심판관의 파견을 요청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인가에 대해서 다들 의아함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르신.”
그건 말타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택 근처의 교구라면 주교께서 거처하시는 성당이 아닙니까? 아무리 어르신이라고 해도 가문의 일원이 아닐 텐데, 일개 평민의 지위로 어떻게 이단 심판관의 파견을 요청한다는 소리십니까?”
“말 한 번 잘했다 말타오. 방금 내가 한 말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가주님의 의지다.”
“가주님이요?”
“그래. 테오라드 가주님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사건의 범인을 찾으라며 내게 가문의 권한을 일부 양도하셨다. 은혜로운 주교께서도 데하름 자작가의 위상을 아는 바, 흔쾌히 이단 심판관을 파견해주실 것이다.”
저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이 없다. 말타오가 침묵하자 하비드가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을 앞으로 뻗으며 의지를 불태웠다.
“거짓말은 마음속의 어둠이며 빛의 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짓이다! 그러니 이곳에 범인이 있다면 듣거라! 네 놈의 사특한 마음을 낱낱이 파헤쳐서 진실을 토해내게 만들 것이니!”
하비드가 노호성을 내지르자 대열의 중앙에 있던 여인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녀의 이름은 레베라. 테오라드가 중정에서 나신의 엘프 노예를 기어 다니게 만든 걸 두 눈으로 목격한 여자였다.
‘서, 설마 가주님이 엘프 노예를 시켜서……?’
비록 가정일 뿐이었으나 전대 가주님의 석상에 오줌을 눈 존재라고 하면 엘프 노예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아닐 거야.’
개인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단 심판관이 자신을 추궁한다면 무서워서라도 그때의 목격담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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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를 타고 상가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나는 아름다운 목재 건축물들을 감상하며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좋다. 좋아.’
엘프가 잠에서 깨기 전에 빠르게 외출하였기 때문에 지금 내 곁에는 엘프가 없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
더해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도 선선하니 기분도 좋았고, 아이들이 뛰어놀며 생기는 귀여운 잡음이나 규중부녀들이 빨래를 너는 모습, 상인들이 목청을 높이며 물건을 파는 행위들이 실로 목가적으로 다가와 심신을 안정시킨다.
‘여기는 여전하네. 도시 전역에 활기가 넘쳐.’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제국의 중부에 위치한 펠가로인 백작령은 참으로 살기가 좋은 곳이다.
백작 각하의 상비군이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으니 범죄율이 눈에 띄게 낮으며, 마물의 출몰 지역과도 거리가 멀어서 혹시 모를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는다.
높다란 산맥에 둘러싸인 지리적 이점 덕분에 유사시에는 천혜의 요새가 되기도 하여 다른 대가문의 시비로 인한 쓸데없는 영지 분쟁이 일어날 리도 없었다. 국지전이 발발하면 불리한 것은 싸움을 거는 쪽이었으니까.
거기다 황도로 가려면 필시 펠가로인 백작령을 지나가야 하였기에 자연스레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여러 상인들이 오고가며 진귀한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는 이곳에서 흔히 일어나는 볼거리 중 하나였다.
이토록 살기 좋은 곳이니만큼 도시를 살아가는 주민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다. 다들 인품이 두텁다고 해야 하나.
내가 이곳에 살고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펠가로인 백작령은 제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을─
“크르렁. 쿠우우…….”
코골이 소리에 상념이 깨어진다. 옆을 돌아보자 흠집투성이의 갑주를 입은 채 불량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는 기사가 보였다.
깎지 않아 거무튀튀하게 자라난 턱수염과, 귀찮다고 혁대를 제대로 매지도 않은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베이넌 브로케나. 데하름 가문의 유일한 가신 기사였다.
원래 가문의 가신 기사는 둘이었으나 한 명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주종의 예를 다했다며 떠나버려서 지금은 베이넌 혼자만이 가문의 기사를 자처하고 있었다.
‘기사를 한 명 더 뽑을까…….’
이런 사람에게 내 호위와 가문의 방비를 전담시키려니 여간 꺼림칙한 것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기사를 한 명 더 영입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 와중, 덜컹! 마차가 멈춰 섰기에 생각을 그만두었다.
잠시 기다리자 마부가 문을 열어주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도착했습니다, 가주님.”
“그래. 고생하였네.”
심심한 감사를 전하며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가 베이넌을 힐끔 쳐다본다.
“기사 나리를 깨울까요?”
“그냥 자게 놔두게. 어차피 형식상 데려온 것이니.”
베이넌을 데리고 들어간다고 한들 시답잖은 농담이나 던질 게 분명하다. 그냥 마차에 두고 가는 편이 속 편했다.
“자네도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아, 예. 알겠습니다.”
마부에게 명령을 내린 내가 상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벽에 걸린 온갖 병장기였으며, 두 번째로 보인 것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너른 공터였다.
흙으로 뒤덮인 공터의 바닥에는 불길에 그을린 흔적과 폭발물의 잔해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저걸 보니 제대로 찾아온 게 맞았다.
“어서옵…….”
카운터에서 시큰둥하게 말을 건네던 주인장이 나를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오라드 나리 아니십니까!”
무신경했던 얼굴에 환한 기운이 감돈다. 주인장은 카운터에서 나오더니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일전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일전이라 하면?”
“테오라드 나리께서 제 여동생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돼지 다섯 마리를 보내주셨지 않습니까? 덕분에 친지들 앞에서 기가 좀 살더랍니다. 여동생도 엄청 좋아했고 말입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너는 황제 폐하께서 팔 년 전에 벌인 오크 정벌 전쟁에서 병장기 납품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더냐. 그것도 우리 가문을 통해서 말이다.”
“예. 그때도 여타 귀족들이랑은 다르게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납품 수수료를 매겨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고요.”
“그건 나에게 고마워할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에게 고마워 할 것이지 않나.”
“두 분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제 여동생의 경조사를 챙겨주신 건 테오라드 나리시기도 하고요. 세상의 어느 귀족이 일개 상인의 여동생까지 챙겨준답니까? 나리는 정말이지 관대하신 분입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아부가 심하다. 나는 조금 떨떠름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과거 이야기는 이만하도록 하지. 나는 잡담을 나누러 온 것이 아니라 무기를 보러 온 것이니.”
“예 알겠습니다. 헌데 무기라고 하시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최근에 공국에서 좋은 물건이 들어왔다고 들었다. 위력을 한 번 보고 싶군.”
“공국에서 들어온 물건? 혹시 대 마물 사냥용 병기를 말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내 말에 주인장은 눈을 몇 번 끔뻑거리더니 진열장에서 작은 박스 하나를 꺼내들었다. 손바닥만 한 박스의 겉에는 웬 비단이 정성스럽게 둘러져 있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주인장은 박스를 들고 공터의 중앙까지 걸어가더니 박스를 바닥에 놓고 돌아왔다. 손에는 버튼이 두 개 달린 작달만한 석판이 들려있었다.
“공국 놈들이 이번에 기가 막힌 물건을 만들긴 했습니다. 일단 위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꾹. 주인장이 버튼을 누르자 공터에 놓인 상자가 순식간에 모래포대로 변했다.
“형상변환 마법을 자동으로 일으켜서 주변 지형지물에 동화됩니다. 그리고 이 밑의 버튼을 누르시면…….”
주인장이 아래버튼을 꾹 눌렀다. 동시에, 섬광이 번쩍였다.
콰앙─!
땅거죽이 뒤집어지고, 폭발한 불길이 끝도 없이 치솟아 오른다. 그 여파로 돌풍이 휘몰아쳐 창문을 거세게 두드릴 정도였다.
내가 깜짝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자 주인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주변을 초토화시킵니다. 사실 공국에서 마물 사냥용 병기라고 내놓기는 했습니다만, 상자를 뒤덮은 알카에라 천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알카에라 천?”
“마나의 흐름을 완벽하게 은폐시켜주는 천이죠. 듣기로는 칠흑의 마탑주도 알카에라 천에 뒤덮인 마도구는 식별하지 못했답니다.”
“칠흑의 마탑주라면 마경의 대마법사라 불리는 사람이 맞나?”
“그렇습니다. 이걸 보면 공국 놈들이 전쟁 병기로 제조한 게 확실하다니까요. 비록 값이 비싸서 대량 양산은 하지 못한다지만 전면전에서 이거 열댓 개만 터트려줘도 적군의 사기가 엄청 꺾일 겁니다. 당연히 진형도 붕괴될 거고요.”
“그러니까…….”
내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질문했다.
“자네가 선보인 이 무기는 원거리에서 원격으로 터트릴 수 있고, 절대로 들키지 않는다는 말이군?”
“어. 요약하자면 그런 셈입니다.”
“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걸 마법사가 밟으면 어떻게 되나?”
“마법사가 말입니까?”
턱을 쓰다듬던 주인장이 시큰둥하게 말을 내뱉었다.
“어중간한 마법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이고,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마법사라고 해도 마나 탈진에 걸릴 겁니다. 체내의 마나가 폭발의 충격을 최대한 완화시켜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마나 탈진 상태에 걸린 마법사는 일반적으로 삼일 내지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건 엘프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터. 그때 엘프를 퇴출시킨다면 나는 평화롭고도 안락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쩐지 희망이 보이는 까닭에 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주인장을 돌아보았다.
“그럼 이걸로 하지. 시범을 보인 것까지 값을 쳐줄 테니 똑같은 걸로 하나 부탁하네.”
“아, 예. 그런데 이걸 대체 어디에 쓰려고 구매하시는 건지……. 혹시 정말로 마물 사냥이라도 나서시는 겁니까?”
“마물 사냥이라…….”
크크. 짧게 웃은 내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고개를 들었다.
“기왕이면 악마 사냥이라고 불러주게.”
주인장에게 ‘대 마물 사냥용 병기’를 사고 보너스로 육포까지 받은 내가 마차로 돌아와 좌석에 걸터앉았다.
“출발하겠습니다!”
덜컹. 마부의 외침과 함께 마차가 길목을 빠져나가 대로로 들어선다.
창밖으로 영지민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바로 옆에서 늘어지는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잠에서 깬 베이넌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아직도 도착을 안 했답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도착하고 물건까지 샀네. 지금은 돌아가는 길이야, 베이넌.”
“응? 예? 왜 저를 안 깨우셨습니까.”
“상가에서 물건 하나 사는데 자네의 호위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더군.”
“허 참. 암살자가 무슨 상황과 장소를 가려가며 도련님을 공격한답니까?”
“비약이 심하다. 나를 노릴 암살자가 천지에 있기는 하겠나?”
내가 퉁명스럽게 반문하자 베이넌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정치 알력의 희생양으로 삼기에는 데하름 자작가의 가주라는 위치가 그리 중한 역할은 아니지요. 만약 희생양으로 삼을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쉬이 건들 순 없을 겁니다. 데하름 자작가는 비유하자면 벌집 같은 거라.”
“벌집?”
“예.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데하름 자작가는 신망이 두텁지 않습니까. 영지민들도 데하름 자작가를 좋아하고, 백작 각하께서도 굳건한 신뢰를 보여주고 계시고요. 그 누구라도 도련님을 공격하는 것으로 펠가로인 백작령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요컨대 벌집 안의 꿀을 먹겠다고 벌들을 화나게 만들어서야 본말전도라는 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벌집이라니.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가 뜸을 들이고 있자 베이넌은 피식 웃으며 좌석에 등을 기대었다.
“그래서 저는 데하름 자작가의 가신 기사라는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신망이 두터운 곳이라?”
“그럴 리가요. 위험한 일 없이 편하게 지내면서 봉급을 까먹을 수 있으니 좋은 것이죠.”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를 되새긴 다음에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에게 주는 봉급에는 품위 유지비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깨달아줬으면 좋겠는데.”
“딱히……. 제가 데하름 가문의 위상에 먹칠을 한 적이 있습니까?”
“네 복식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갑주의 손질과 보수는 기사의 기본 소양이다.”
베이넌이 여유롭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도련님이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기사단 출신의 귀족들이나 쓸데없이 복식에 힘을 주고 다니는 거지, 저처럼 전통성을 중시하는 진짜배기 기사들은 갑주의 흠집을 훈장으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많은 전투를 겪었다는 뜻이니까요.”
몇 번이나 들어서 이제는 지겨울 정도다. 하긴 갑주를 새 것으로 하나 사주겠다고 해도 극구 거절하던 괴짜이니 내가 설득한다고 통할 리가 없었다.
내가 백기를 들고 시선을 거두자 베이넌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도련님. 엘프 노예랑은 재미를 좀 보고 계십니까?”
엘프 노예라는 말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안면 근육이 꿈틀거린다. 재미를 보고 있기는 하지. 내가 아니라 엘프가.
“별 게 다 궁금한 모양이군.”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가슴도 크고 골반도 관능적인데다 머릿결은 비단 같고 얼굴은 경국지색이니. 거기다 평소 여색을 멀리하시던 도련님께서 한 눈에 반해 데려올 정도면 말 다한 거지요.”
“확실히 예쁘긴 하다만…….”
“그래서, 하셨습니까?”
“하다니 뭘?”
“이거 말입니다, 이거.”
옆을 흘겨보니 베이넌이 양손을 마주잡고 손바닥을 눌렀다가 떼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공기와 살결이 부딪치는 소리가 묘하게 야릇하게 들려왔다.
미친놈이. 행동은 베이넌이 하는데 괜히 내가 부끄러워졌다.
“망측한……. 그만두지 못하겠는가!”
“설마 아직도 안 하셨습니까?”
“그만두래도!”
내가 재차 소리치자 베이넌이 머쓱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그냥 도련님이 걱정되어 말씀을 드린 겁니다. 언젠가 에실리 아가씨와도 밤일을 도모하셔야 할 텐데 노예로 미리 연습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런 걸 왜 연습하나?”
“잘 모르시나본데. 남자는 원래 첫 경험에서 토끼가 되곤 합니다. 여자 쪽에서는 이제 좀 전희를 느끼고 있는데 남자가 먼저 가보십시오. 좋아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토끼라니?”
“여자 쪽에서, 재미를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사정하는 남자를 낮잡아 부르는 말입니다. 참고로 저도 첫 경험은 토끼였습니다. 사정에 이른 시간이 정확히 3분 48초였으니까요. 붉은 장미 주점의 매춘부인 타닐라와 관계를 가졌죠.”
“아니. 사정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는 건가?”
“속으로 새면서 박았습니다. 기념비적인 날이었으니까요.”
미친놈인가 진짜.
“……됐으니까 해괴망측한 소리는 그만두게. 그리고 베이넌.”
“예 도련님.”
“그놈의 도련님 소리는 그만하면 안 되겠나? 나는 엄연히 데하름 자작가의 가주란 말일세. 부탁이니 호칭에 경의를 가지게.”
베이넌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거리다가 까무잡잡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저는 엄청 오랫동안 도련님을 도련님이라 불러오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저한테 검술을 가르쳐달라며 눈을 빛내던 도련님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추억을 잊으라는 소리가 아니지 않은가.”
“흐음. 그래도 도련님이라 부르는 게 옛 생각도 나고 좋지 않습니까? 더구나 도련님은 요새 가문의 번영만을 신경 쓰시며 종일 일만 하시니 보기에 답답할 정도입니다. 전대 가주님께서 바라신 것은 가문의 번영이 아니라 도련님의 행복이었을 텐데요.”
말이 옆길로 샌다. 베이넌이 의도적으로 대화의 주제를 비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도 나를 가주님이라 부르기가 싫은 건가.
나를 아직도 애처럼 생각하는 건지, 나를 가주로 인정하지 않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라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쯧. 자네 마음대로 하게.”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니 베이넌이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베이넌은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참. 오랜만의 외출이신데 식사라도 하고 들어가시겠습니까?”
“쓸데없는 지출이야. 식사라면 저택에 돌아가서 하면 된다.”
“그렇습니까. 아쉽습니다. 도련님한테 제가 아는 가게를 소개시켜드리고 싶었는데. 거기가 요리를 엄청 잘 하거든요.”
무시하자.
“고기는 씹자마자 육즙이 쫙 터지고 가니쉬로 나오는 채소들도 하나같이 신선한데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해산물들도 갓 잡아온 것처럼 펄떡거리죠. 특히 양념에 절인 새우의 쫄깃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시해야 하는데…….
“치즈를 갈아 넣은 마케로니는 또 어떻고요? 좋은 재료가 솜씨 좋은 주방장의 손을 만나서 조화롭게 어울리며 입 안을 휘젓고 다니는데, 가히 천상의 맛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로 황홀하더랍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침샘에서 흘러나온 침이 구강에 범람한다. 한동안 침음하던 내가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자네가 정 그렇게 애원한다면 답사를 한 번 가보도록 하지. 저택의 주방장에게 요리에 대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흐흐. 알겠습니다.”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베이넌이 얄미웠지만, 맛있는 음식을 포기할 순 없었다.